▲동백꽃 전설에 따르면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여인의 피가 꽃이 되었다고 한다. 그 전설 때문일까, 피어나는 붉은 꽃송이들이 말 못 하고 눈빛으로만 전하는 고백처럼 애처롭다.
김재근
오후 여정의 첫머리는 오동도다. 입구부터 나들이객으로 북적였다. 해상케이블카 탑승장이 있는 자산공원과 세계박람회장이 만나는 지점, 차를 세우기도 만만치 않았다. 차보다는 걷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오동도는 섬의 모양이 오동잎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동백꽃의 성지가 되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동백나무 터널을 만난다. 전설에 따르면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여인의 피가 꽃이 되었다고 한다. 그 전설 때문일까, 피어나는 붉은 꽃송이가 말 못 하고 눈빛으로만 전하는 고백처럼 애처롭게 다가왔다. 하얀 등대와 기암절벽, 그리고 숲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은 오동도를 여수의 보석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동도 입구에서 뜻밖의 장소와 마주했다. 여순사건 기념관이다. 1948년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현대사의 아픈 상흔이 아카이브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 총을 형상화한 포토 존 뒤로 해방 직후의 혼란과 눈물이 겹쳐진다. 다음 행선지인 만성리로 향하는 발걸음에 묵직한 서사 하나를 얹어주었다.

▲마래2터널 진입 전 신속통과라는 문구가 실감난다. 1차선 왕복차선으로 운전 도중 차를 세울 수가 없다. 내부 사진을 찍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김재근
만성리 해변으로 가는 길목, 바위산이 입을 크게 벌린 듯하다. 마래2터널이다. 왕복 1차로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터널이면서 일제에 의해 건설된 국내 유일의 차량 통행용 자연암반터널이다.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정과 망치로만 팠다고 한다. 신호를 기다려 들어선 터널, 울퉁불퉁 정으로 쪼아낸 자국이 그대로 남은 거친 바위다. 새가 쪼아먹다 남은 백설기 같은 표면이었다. 교행을 위해서인지 100여 미터마다 대피 공간이 있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만성리. 형제묘와 위령비가 맞이한다. 여순사건 진압군에 의해 학살된 125구의 시신을 구별할 길이 없어 커다란 봉분 하나에 모두를 묻고 형제라 불렀던 자리다. 죽어 형제가 된 이들의 무덤 앞에서 시선은 아래로 꺾인다. 이 시린 정적 끝에 펼쳐진 만성리 검은 모래 해변은 그래서인지 애잔하게 다가왔다.
노래 한 곡이 일군 기적

▲만성리검은모래해변 원조 여수 밤바다. 검은 모래라기 보다는 약간 어두운 색의 모래였다.
김재근
원조 여수 밤바다. 검은 모래라기 보다는 약간 어두운 색의 모래였다. 방파제 계단에는 수많은 커플의 흔적이 이곳이 원조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잔잔한 바다엔 점점이 배가 떠간다. 너무 큰 기대를 품고 오면 실망할 수 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나서듯 들르면 만족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수 장범준이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수 밤바다>(2012년 버스커 버스커 1집 수록곡)의 영감을 얻은 낭만의 산실이기도 하다.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밥 딜런이 대중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반열로 격상시켰다면, 장범준은 여수의 밤바다를 낭만이 반짝이는 수평선 위에 올려놓았다.
한 곡의 노래가 지닌 힘은 천 편의 시보다 위대했다. 2012년 700만 명에 머물던 관광객이 2023년 무려 2759만 명으로 불어난 경이로운 숫자는 노래 한 곡이 일군 기적이다. 그래서일까. 여수에는 여수를 먹여 살린 장범준이 방문한 곳이라는 현수막을 내 건 식당이 이미 여럿이라 한다(장범준 이야기는 LS네트웍스에서 발행하는 <보보담> 통권 53호 참조).

▲하멜등대 네덜란드인 하멜이 13년간의 억류 생활 끝에 일본으로 탈출했던 항구가 연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김재근

▲여수 밤바다 해상케이블카에서 본 풍경.
김재근
여정의 마무리는 낭만 밤바다. 땅거미가 내리자, 여수는 본연의 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종포항 하멜등대가 노을로 물들어 가는 시간, 네덜란드인 하멜이 13년간의 억류 생활 끝에 일본으로 탈출했던 항구가 연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등대는 먼바다를 바라보는 이방인의 그리움인 듯 붉게 타올랐다.
종포 포장마차 거리에 불이 하나둘 켜진다. 바로 뒤 자산공원에서 해상케이블카를 탔다. 거북선대교의 조명이 수면 위에 긴 빛줄기를 드리우고, 밤바다의 불빛이 은하수처럼 흐른다. 환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장범준의 <여수 밤바다>를 듣는다. 가사를 따라 흥얼거린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 주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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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파니스'는 함께 빵을 먹는다는 라틴어로 '반려(companion)'의 어원이다. 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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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가게마다 긴 줄, 먹어보니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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