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교문 앞에 선 남편, 새학기에 더 바빠진 이유

끝이 아닌 새로운 용기로 다시 자리를 찾는 것... 건강 관리 하며 이어온 남편의 시간들

등록 2026.03.06 17:36수정 2026.03.0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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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일, 새 학기가 시작됐다. 교문 앞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새 교복을 입은 1학년의 어색한 표정, 친구를 다시 만난 2, 3학년의 웃음, 교문을 드나드는 학부모의 발걸음이 한꺼번에 겹쳤다.

남편은 퇴직 후 이어오던 봉사 활동을 지난해 10월 아킬레스 건염 수술로 잠시 쉬었다. 다행히 올해 재활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고등학교 안전지킴이로 첫 근무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는 목발을 짚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내렸다.


수술 후 재활 기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오래 서 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새 학기 첫날을 교문 앞에서 맞겠다고 했다. 학생들이 가장 낯설고, 가장 분주한 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2월,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본 뒤 결정된 자리였다.

작은 손짓과 말 한마디로 예방하는 사고

요즘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안전'을 끊임없이 점검받는 공간이다. 학교폭력, 외부인 출입, 등하굣길 교통사고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학교 울타리 안팎의 안전은 더 이상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 사회와 어른들의 관심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 낯설지 않다.

남편이 맡은 안전 지킴이 역할은 단순히 교문 앞에 서 있는 일이 아니다. 교문 주변과 학교 내 취약 구간을 살피며 학생들 사이에서 갈등이나 위험 상황이 감지되면 즉시 학교에 알린다. 눈에 띄는 행동보다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살피고 대비하는 것이 그의 중심 업무다.

수업 시간 동안에는 교문을 드나드는 외부인도 주시한다. 방문 목적을 확인하고 필요할 경우 행정실과 연결 한다. 교문은 열려 있지만,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은 아니니 주변을 지키는 것이다. 등·하교 시간대에는 학생과 차량이 한꺼번에 몰리는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 준수를 안내한다. 우회전 차량이 속도를 줄이는지 확인하고, 이어폰을 끼고 무심코 차도로 내려서는 학생을 한 번 더 멈추게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작은 손짓과 말 한마디가 사고를 예방하는 중요한 순간이 된다.


 학교의 안전을 지키는 일.
학교의 안전을 지키는 일. joyshotsphotography on Unsplash

그 외에도 학교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시험 기간이나 학교 행사처럼 학생 이동이 많거나 위험이 예상되는 시간에 추가 보호 활동을 수행한다. 남편은 언제나 상황을 살피고, 학생들을 안전하게 지킬 방법을 고민하며 그 자리를 지킨다.

올해 근무 시간은 오전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학생들이 가장 많이 움직이는 시간대다. 점심시간의 교문, 오후 수업이 끝난 뒤의 횡단보도는 생각보다 분주하다. 겉으로 보기엔 조용해 보여도, 잠깐의 방심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저녁 식탁에 마주 앉으면 남편의 하루 이야기가 시작된다. 학교 안전 지킴이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우리 부부의 대화도 조금 더 풍성해졌다. 학교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장면들이 밥상 위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오늘도 같은 학생이 점심시간에 교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더라."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다른 애들은 안 나가?"

"대부분은 규칙 잘 지켜. 말하면 바로 돌아가."

남편은 잠깐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꼭 한 번 더 나가보려는 학생이 있어. 그래서 내가 또 부르지. '지금은 안 된다'고."

별일 아닌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런 장면들이 하루에 몇 번씩 반복된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의 하루 보고는 늘 비슷하다.

"오늘도 별일 없었어."

그 말이 가장 듣기 좋다. 수업 시간에 교문을 서성이던 외부인을 학교에 안내했고, 하교 시간에 급히 뛰어나오던 학생을 한 번 더 멈춰 세웠다는 정도의 이야기. 크지 않지만, 그냥 지나쳤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는 장면들이다. 그래서 안전지킴이의 하루는 조용하다. 하지만 그 조용함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퇴직 후, 남는 시간에 대하여

퇴직을 앞두거나 이미 퇴직한 지인들을 만나면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시간은 많은데, 막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일 중심으로 흘러가던 시간이 갑자기 비면, 하루가 길어지기도 한다. 남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재활로 강제 휴식을 겪으며 그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때 이런 말을 했다.

"몸이 회복되면,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다."

퇴직 후에도 우리 부부의 하루는 규칙적이다. 삶은 달걀과 야채 샐러드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오전에는 헬스장에 간다. 발목과 하체 근력을 단단히 키우는 운동을 꾸준히 한다. 남편에게 운동은 단순한 건강 관리가 아니다.

건강을 지키는 일이 곧 봉사를 오래 이어가기 위한 준비다. 이른 점심을 먹고 간단한 간식을 챙긴 뒤, 오전 11시 30분 학교로 향한다. 그의 하루는 운동과 봉사로 채워진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규칙적이고 단단하다.

퇴직은 삶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자리로 옮겨 서는 용기 있는 시작일 수 있다. 매일 출근하던 회사 대신, 사람과 공간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를 세우는 일. 돈을 버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퇴직자는 흔히 '시간은 많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과 마주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의 경험과 습관, 단단해진 몸과 마음은 누군가의 하루를 지킬 힘이 된다. 지난해 김밥과 과일 도시락을 들고 학교를 향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나는 그런 작은 선택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깨달았다.

퇴직 후의 삶은 '멈춤'이 아니라, '어디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는 시간이다. 그 선택이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안전하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 큰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나를 세우는 시기. 남편의 하루를 보면, 퇴직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용기를 내어 다시 자리를 찾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자리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박수를 받는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분명 필요한 자리다. 3월의 학교 곳곳을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은 바쁘다. 재활로 멈춰 있던 시간이 이제는 누군가의 안전을 지키는 시간으로 흘러간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퇴직 후 삶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거창한 목표 대신 '내가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를 먼저 물어보면 어떨까. 누군가의 하루가 조금 더 안전해지도록, 내가 설 수 있는 자리 하나 쯤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퇴직 #봉사활동 #학교안전 #안전지킴이 #사회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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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를 읽고, 글을 씁니다.나이 들어가는 삶의 감각과 가족. 부부의 시간,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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