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3월 4일, 한북정맥 줄기
안호용
정상은 사방이 탁 트였다. 서쪽으로 포천과 일동 일대가 조망되었고, 동쪽으로는 1000미터가 넘는 준봉들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나는 이곳을 경기의 카라코람이라고 부른다. 경기 제1봉인 1468미터의 화악산과 제3봉인 1252미터의 명지산과 제4봉인 1167미터의 국망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밖에도 1000미터가 넘는 견치봉, 석룡산, 귀목봉 등이 산맥을 따라 연결되어 있다. 이 작은 강씨봉는 그 중에 막내뻘이다.
사실 오늘 강씨봉을 찾은 이유도 이 장쾌한 풍광 때문이었다. 7~8년 동안 봉우리를 외면하고 산허리와 발밑에서만 줄곧 걸었는데 지난주에 문득 봉우리에 오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조망의 으뜸은 단연코 강씨봉이었다. 산세가 완만하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어서 트레킹에 몸이 만들어져 있음에도 기꺼이 작정을 한 것이다.
어렵지 않게? 사실 그것은 평상시에 국한된 것이고 이런 설산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였다. '어렵지 않게'가 아니라 고단한 여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수고대하던 풍광도 만끽하고, 이른 점심도 먹은 후 드디어 2차전에 돌입하였다. 이미 올라올 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탓인지 걸음은 무거웠고, 작은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숨이 거칠어졌다.
능선 트레킹은 크고 작은 봉우리를 수없이 거쳐야 하기 때문에 생각 외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더구나 눈 쌓인 이런 트레일은 더욱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많은 봉우리와 눈과 악전고투를 하며 걷다가 이름 없는 어느 봉우리 벤치에서 잠깐 쉬었다. 몸이 지치면 시간도 더딘 법이다. 시간이 많이 간 것 같지만,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다.
이제 봉우리가 낮아지면서 조망도 사라지고 이 능선 상에 있는 귀목봉 만이 나를 측은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뚝이 고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서풍이 세차게 분 능선에는 눈이 한아름 쌓여 무릎까지 빠지는 곳도 많았다. 입에서 악소리가 났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평소 같으면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거의 두 배 가까이 소비한 끝에 학수고대하던 오뚝이고개에 도착하였다. 중간에 잠깐 허리에 맨 가방을 잃어버려 다시 찾은 탓도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한참 지체된 것은 사실이었다. 강씨봉 휴양림에서 버스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으면 일동으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시간은 부족하지 않았다.
오뚝이고개의 명칭은 오래전 오뚝이 부대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고갯길을 확장하면서 붙인 군대식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고개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논남기의 화전민들이 일동으로 넘나들던 소통의 길이다. 수확한 뿌리 작물이며 산속에서 캔 약초들과 때로는 장작을 지게에 지고 일동장에 나가서 쌀과 보리와 일용품과 교환하고 돌아오던 생존의 고개였다.

▲ 2026년 3월 4일, 논남기 계곡 상류
안호용
이제부터는 지옥 같은 능선 길은 사라지고 평화로운 하산길이 이어진다. 바로 화전민의 숨소리가
배어있는 공간이다. 잠시 몸과 마을을 추스른 나는 눈 덮인 논남기 계곡으로 발길을 옮겼다. 두꺼운 솜이불처럼 수북하게 쌓인 눈길로 내 발자국을 만들어내며 앞으로 걸었다. 화전민들은 한 겨울 폭설이 내린 날에는 어떻게 이 길을 넘나들었을까.
30여 분 지나자 눈은 사라지고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숲길이 반겼다. 겨우내 덮여 있던 얼음을 깨고 나온 계곡 물소리가 아늑하게 들려오고, 작열하던 태양도 이제 머리 뒤로 한가롭게 뉘엿거리고 있었다. 고단했던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처음 생각보다 엄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두려움 없이 잘 버티어냈다. 길을 가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고될 줄을 알았다면 물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끝이 평온할지라도 과정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힘들면 마음에 상처만 남길 뿐이다.
계곡 바람이 잠시 귓가를 스쳤다. 그 바람을 타고 산 능선에서 홀로 눈길을 내며 걸어온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하지만 그 장면은 시나브로 종적을 감추고, 순간 갈증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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