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등록 2026.03.10 09:20수정 2026.03.10 15:53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양파가 통통하게 많이 자랐네. 상추도 안 죽고 잎이 새로 났어."
비가 내린 뒤 채소들도 겨울 가뭄의 갈증을 해소한 듯하다. 지난 가을 심은 양파 모종이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5월 말쯤 수확할 시기가 되면 양파 뿌리가 얼마나 굵어질지 기대 만땅이다. 이대로 잘 자라기만 하면 100개 정도는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시나 해서 뿌리가 살아있는 상추를 겨울 내내 하얀 '보온포'로 덮어두었는데, 걷어 보니 세상에, 봄 기운에 상추 잎이 벌써 제법 크게 자랐다. 보기엔 보드랍기만 한데 겨울을 견디는 이런 강인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놀랍기만 하다.

▲ 지난 가을에 심은 양파 모종이 잘 자라고 있다. 겨울 한파에도 상추는 잘 살아남아 연한 잎을 피웠다.
이정미
지난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잡초와의 전쟁'이었다. 오도이촌 생활을 하는 우리는 '주말 농부'이다. 일주일에 한 번, 여의치 않으면 건너뛰기도 해서 그때 그때 풀을 정리할 수 없는 형편이다. 6월부터는 쑥쑥 자라는 풀 때문에 느루뜰은 밭이 아니라 그야말로 '밀림'이 되었다.
남편은 "풀도 먹고 살아야지. 가을, 겨울에는 저절로 말라죽는데... 보기에 좀 그래서 그렇지..." 하며 구실을 대곤 했다. 그래도 풀이 보기 흉하게 웃자라 있는 밭은 관리되지 않은 버려진 모양새라 내 마음이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는 풀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뒤늦게 빈 밭두렁에 제초매트를 깔았다. 우리의 노동도 한결 수월해졌다. 그래서 올해는 잡초가 싹을 틔워 자라기 전에, 갖가지 채소를 심을 밭두렁을 제외한 빈터와 감나무 사이 땅에 검정색 제초매트를 깔았다.
요즘은 농사에 필요한 도구들이 좋아서 초보 농사꾼도 어렵지 않게 농사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 같다. 풀 뽑을 때도 쪼그려 앉지 않고 서서 가볍게 내려치는 동작으로 해결되는 도구가 있다. 작은 잡초 싹을 긁어내는 도구도 있다. 도구를 잘 활용하면 허리나 무릎을 상하지 않고 땀흘려 일하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시골길에서 만난 봄
점심을 먹은 후 쓰레기 분리수거도 하고 시골에 온 봄도 찾아볼 겸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침에는 영하 3도로 기온이 떨어졌는데, 한낮이 되니 햇살이 포근하여 봄이 속삭거리는 듯 했다. 시골이 좋은 이유, 온통 자연이 꾸미지 않은 맨얼굴 그대로 활짝 웃고 있다는 거다. 발 닿는 곳, 눈길 머무는 곳에 꼭 그 계절에 맞는 풍경을 그려낸다는 거다.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 '자연'이라는 것이 참 신비롭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조용한 시골길은 온통 내 차지가 된다. 오십 고개 아줌마가 소녀처럼 통통 춤추듯 걷는 모습을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하겠지만, 시골길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살랑이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도 이런 자유로움이 만족스럽다.
'어디 어디 숨었나.'
나의 눈은 봄을 찾기에 바쁘다.

▲시골길 산책에서 만난 봄 상사화 새순, 생태 호수 청둥오리, 홍매화, 민들레, 보라빛 광대나무풀
이정미
마른 땅에 빼꼼 고개를 내민 고운 연두색 싹은 상사화 새순이다. 이 잎이 키를 키우고 다 떨어진 후 7~8월에 꽃대가 올라온다.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해서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다와 강이 만나 호수가 형성된 생태 습지에는 청둥오리 가족이 한가하게 놀고 있다. 날씨가 더 따뜻해지면 추운 지방으로 떠나려나(최근에는 많은 수의 청둥오리가 텃새화 되었다고 한다).
마른 풀이 뒤덮힌 길섶에 한 그루 홍매화가 화사하게 피었다. 가지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 '암행어사 어사화' 같다. 키 작은 노란 민들레가 귀엽게 웃고 있다. 논을 가득 메운 보라빛 꽃은 '광대나무풀'이다. 일부러 심어 놓은 것 같지는 않은데, 풀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으니 수수하고 은은한 보라 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화려한 꽃에 뒤지지 않는다.
논두렁 옆 둔덕에는 하얀 매화가 한창이다. 투명한 파란, 먼 하늘이 시골 마을을 온화하게 보듬고 있다. 봄은 노랑으로, 분홍으로, 연두로, 하양으로 오고 있었다.
예술 작품이 따로 있나
마을 안으로 난 길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나, 저 돌길을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너무 예쁩니다."
어르신이 밭에서 잔돌을 부지런히 골라내고 계셨다. 어르신은 원래 있던 길이 비가 많이 오면 잠기기도 해서 밭 가운데에 새롭게 돌길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곡선으로 길의 윤곽을 그리고 큰 돌로 길 가장자리를 만든 후 잔돌로 길 폭을 촘촘하게 채워 넣었다.
"돌길이 예술이네요!"

▲ 어르신이 밭에서 잔돌을 가려 돌길을 만들었다.
이정미

▲ 어르신이 밭 가운데에 만든 돌길이 예술이다.
이정미
'이런 인내, 집중, 성실함, 꾸준함, 창조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혼잣말을 하게 된다. 오랜 시간 노동으로 단련된 손과 정신의 힘일까! 느루뜰 진입로가 울퉁불퉁 엉망이라 '야자매트'를 깔아야 할까 고민중인데 잔돌길도 운치있고 예쁘다.
어르신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말을 거니 하던 일을 멈추시고 이것 저것 물으셨다. 당신 딸과 나이가 비슷하다며, 어디서 사는지, 애들은 몇인지 호구 조사를 하신 후 당신의 농사 노하우를 초보 농부인 나에게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내가 전문가니까 잘 들어. 지금은 감자를 심어야 해. 거름은 샀나? 거름을 뿌린 후 바로 심으면 안돼. 한 15일 정도 묵혔다가 심어야지 잘 자라."
어르신 말씀처럼 이장님의 도움을 받아 거름은 가득 사두었다. 2주 전에 거름도 뿌려 두었다. 다음 주에는 시장에 나가 씨감자를 사서 심어볼까 싶다. 어르신은 딸 같은 나를 보며 "우리 집에 놀러 와" 하셨다. 빵이라도 사 들고 와서 농사 이야기, 사시는 이야기도 듣고 해야겠다.
더 머물고 싶은 곳
"4시 경에 넘어가게..."
"그냥, 자고 내일 일어나자마자 넘어가면 되지."
일요일 오전에 성당 차봉사 당번이라 원래는 오후에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느루뜰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서 자꾸만 더 있고 싶어진다. 저녁은 읍내에 나가서 먹기로 하고 남편은 제초매트 작업을 마무리하고 복숭아 나무와 사과 나무에 거름도 넣었다.
나는 지난 주 비온 뒤 폭신해진 밭고랑 흙을 호미로 고르고 손으로 으깨어 부드럽게 만든 후 상추 씨앗을 심었다. 비온 뒤 눈에 띄게 키가 자라고 통통해진 시금치도 가득 땄다. 성당 이웃에게 나눠줄 것이다.

▲생태습지의 저녁 바다와 강이 만나는 생태 습지길 위로 저 멀리 해가 서산으로 가라앉고 있다. 느루뜰 하늘에는 총총총 별이 빛난다.
이정미
하루 종일 일 삼매경에 빠졌던 남편은 저녁을 정말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다과 강이 어우러진 생태 습지 길을 걸으며 소화를 시켰다. 멀리 해가 산 아래로 떨어지며 하늘과 산, 마을과 호수를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느루뜰로 돌아와 올려다 본 초저녁 하늘에는 별이 총총총 빛나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책읽기, 글쓰기, 여행을 좋아합니다. 타인과 연결되어 자신의 성장을 너머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살고자 합니다.
공유하기
시골 밭 한가운데 돌길... 예술 작품이 따로 없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