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여성의전화 이제 활동가
취재원 제공
'교제폭력'이라는 이름은 사회적 경각심을 높였지만, 동시에 폭력이 발생하는 관계를 '교제 중인 연인 사이'로 좁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현 연인을 포함해 썸 관계, 사실혼 등 다양한 형태에서 폭력이 발생한다.
현장에서 피해자를 지원해 온 활동가들은 폭력의 본질이 '친밀성'에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러한 현상을 '친밀한 관계 내 폭력'으로 명명하며, 사회가 폭력의 범위와 책임을 보다 넓게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법 개정과 함께,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을 개인 간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 보는 인식이 동반될 때 비로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 2월 12일,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현안대응팀의 이제 활동가를 만나 왜 법과 사회적 인식이 함께 변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봤다.
친밀한 관계 내 폭력,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 친밀한 관계 내 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상담 현장에서 친밀한 관계 내 폭력 양상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
"언론 보도 건수가 늘었다고 해서 갑자기 새로운 폭력이 생긴 것은 아니다.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은 늘 존재했다. 기존에 존재하던 폭력이 뒤늦게 이름 붙여지고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관계 양상이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았다. 피해 유형을 집계하면 신체적 폭력, 정서적 폭력, 경제적·성적 폭력 순으로 나타나며, 이 유형들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의 특징이다."
-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의 신고·입건 건수와 피해 경험률은 늘고 있지만, 피해자들의 체감 안전은 제자리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왜 이런 간극이 발생한다고 보는가?
"신고·입건 건수와 피해 경험률이 늘고 있지만, 여성들의 체감 안전은 같이 올라가지 않는다. 현장에서 느끼기에도 변화의 속도는 피해자들이 겪는 현실보다 훨씬 더디다.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 및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를 분석한 결과, 2024년 기준 약 15.8시간마다 한 명의 여성이 이런 위험에 노출된다. 이 수치는 언론에 보도된 것만 기준으로 한 '최소치'다.
폭력의 근본에는 '이 여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통제할 수 있다'라는 인식이 자리한다. 체감 안전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폭력이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와 인식 속에서 여전히 허용되고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에는 여전히 공백이 많고, 현행법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법이 바뀌면 경찰 같은 1차 대응 기관의 매뉴얼이 바뀌고, 예산 투입과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유기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은 그 연결고리가 끊겨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신고조차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장벽
- 피해자들은 폭력을 겪고도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고를 망설이게 만드는 구조적 장벽은 무엇인가?
"신고율 자체가 1%대일 정도로 낮다는 것은, 첫 한 걸음을 떼기까지 망설임이 크다는 뜻이다. 구조적으로는 우리가 여전히 친밀한 관계나 여성 폭력을 '사소화하는 문화' 안에 살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폭력을 사회 구조의 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의 불운이나 가해자의 일탈, 혹은 병리적 문제로 축소해 보는 경향이 강하다.
가해자의 처벌보다는 가해자와의 분리를 우선으로 원하는 피해자가 많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곧바로 고소와 형사처벌로 연결된다. '내가 이 사람 인생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이제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는 공포가 동시에 작동한다.
형사처벌 중심 접근은 신고를 '인생을 건 선택'으로 만든다. 피해자의 분리와 안전을 보장할 중간 단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고 문턱은 더 높게 느껴진다."
- 신고가 곧 안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제기된다. 실제 피해자가 신고 이후 어떤 과정을 겪게 되나?
"신고 이후에도 피해자가 마주하는 장벽은 적지 않다. 첫 번째는 '경찰 대응의 한계'다. 여러 차례 신고와 자료 제출에도 가해자가 구속되지 않고 피해자를 추적하거나, 현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제대로 분리되지 않는 사례가 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거나 관계 회복을 권유하는 2차 가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2024년 경찰에 의한 2차 가해 피해는 전년도 대비 24.2%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경찰을 신뢰하고 사실대로 진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두 번째 부담은 가해자가 쌍방 폭력이나 무고를 주장하며 '역고소'를 진행하는 경우다. 실제 법적 판단과 별개로 이런 주장은 피해자를 극도로 위축시킨다.
셋째는 사법 절차 과정이 피해자의 일상에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직장이나 학교에 다니면서 절차를 감당하려면 제도적 보호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에는 폭력을 이유로 별도의 법정 유급 휴가를 보장하는 제도가 없다.
반면 호주의 공정 근로법(Fair Work Act 2009)은 연 10일의 유급 '가정·가족폭력 휴가'를 보장한다. 이런 제도적 차이가 신고를 둘러싼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요소로 작용한다."
비형사적 보호, 피해자가 떠맡는 구조
- 비형사적 분리 보호 조치는 현재 어느 정도 마련돼 있으며, 실질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나?
"비형사적 분리·보호 조치는 쉼터, 임시 숙소, 스마트워치, CCTV, 가해자·피해자 분리 조치 등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한계가 많다. 쉼터는 기본적으로 '비밀 쉼터'라 위치를 공개할 수 없다. 가해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입소를 결정하면 피해자의 일상이 크게 바뀐다. 또한 공동생활이 대부분이고 개인 공간이 협소한 경우도 많아 '쉼터로 가는 것'은 매우 큰 결심을 요구한다.
스토킹 피해 때문에 부담해야 하는 이사 비용 지원에도 한계가 있다. 피해자가 경찰이 안내한 임시 거처보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개인적으로 찾고, 민간 경호 업체에 비용을 지불해서 경호받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것이 비형사적 보호 체계의 현실이다.
지금 제도는 여전히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구조'다. 가해자가 분리되고 이동을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살던 곳을 떠나고 생활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식으로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잘못한 사람은 가해자인데, 후속 처리를 모두 피해자가 떠맡는 구조가 제도 전반에 깔려 있다."
- 교제폭력 방지 논의가 형사처벌 강화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한계와 피해자 부담은 무엇인가?
"지금 교제폭력 대응 논의를 보면 주로 '몇 년형을 선고할 것인지', '구속할 것인지' 같은 형사처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처벌 강화는 분명 필요하지만, 그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엄벌주의에 치중하면 처벌 이후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고민이 사라질 수 있다. 피해자가 20대 초반 큰 피해를 겪고, 가해자에게 긴 징역형이 선고되더라도, 가해자가 출소 후 피해자를 찾아올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그 사이 피해자가 주거·경제·심리적으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와 예산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현행 체계는 거의 그 부분을 비워둔 상태다.
현재 법률 구조는 '관계의 특성과 성차별 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형법상 폭행·상해·강간·치상죄, 성폭력처벌법 등을 통해 처벌은 가능하지만, 이 법들이 친밀한 관계라는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가정폭력처벌법 역시 피해자 인권과 가해자 처벌보다 가족 유지를 우선하는 조항이 있다. 이 점이 형사처벌 중심 접근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젠더 권력과 연애 문화의 구조적 위험
- 교제폭력 사건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젠더 권력의 작동 방식은 무엇인지, 현 사회의 연애 문화가 여성에게 어떤 위험을 구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보나?
"교제폭력은 요즘 들어 새롭게 등장한 폭력이 아닐뿐더러 언론 보도가 늘었다고 해서 새로 생긴 현상도 아니다. 폭력의 특성 자체에는 '젠더 권력과 규범'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차별적인 사회'다. 성차별이 가장 농축되어 드러나는 장이 바로 친밀한 관계, 연애·혼인 관계다. 그 안에서 젠더 규범이 더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여자는 이렇게 해야 한다, 남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역할 기대가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방식에 깊게 박혀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내가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사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결과 가해자는 사랑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상대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경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연인 관계에서 '연인이니까 맞춰줘야지'라는 말, '너는 나랑 사귀는데 이 정도도 안 해줘? 네가 나를 사랑하긴 해?' 같은 말은 여성을 점점 더 수동적인 위치로 밀어 넣고, 남성의 요구를 중심으로 관계를 설계하게 만든다.
이런 문화가 안전 이별, 거절 살인 같은 말을 낳은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관계를 끝내려는 순간이 오히려 가장 큰 위험에 놓이는 현실, 그것이 지금 한국 연애 문화가 여성에게 내포하는 구조적 위험이다."
- '왜 신고 안 했나'가 아니라 '왜 신고하기 어렵게 돼 있나'를 묻기 위해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지만, 법 개정과 사회적 인식 개선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언론은 그 사건이 드러내는 제도적 허점과 구조적 문제를 꾸준히 보도해야 한다. 큰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때는 많은 기자들이 몰린다.
그러나 1심부터 3심까지 재판을 거치면서 가해자 주장이 어떻게 바뀌는지, 판결이 어떤 메시지를 사회에 던지는지, 이후 법·제도 논의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끝까지 보도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 피해자·유족에게 가장 중요한 시점은 오히려 판결이 나는 순간인데, 그때 언론의 관심이 끊기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성평등 인식을 개선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UN 개발계획의 젠더 사회규범 지수에 따르면, 조사 대상 37개국 가운데 한국이 성별에 대한 편견이 가장 악화한 나라로 보고됐다. 즉, 우리는 성평등 인식에서 계속 후퇴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평등을 '누군가의 이익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이해하는 교육이 어릴 때부터 필요하다.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온라인 공간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다양한 현장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타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시민'이 되기 위해 어떤 제도·예산·교육이 필요한지 범정부·범사회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살아남은 여자들]
①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교제폭력 3번의 신고,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https://omn.kr/2gr4r
②
가랑비에 옷 젖듯, 교제 폭력은 그렇게 시작된다 https://omn.kr/2h51i
③
"교제폭력으로 인한 죽음 막으려면 특별법 따로 만들어야" https://omn.kr/2h62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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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고 안 했나'는 틀렸다, 교제폭력 피해자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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