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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왕사남> 보고 간, 아이들의 발이 멈춘 곳

영화 본 뒤 떠오른 대정읍 추사관...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 그곳에서 함께 본 <세한도>

등록 2026.03.09 15:27수정 2026.03.0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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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였다. 왕에서 노산군이 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 그 장면을 보다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제주 대정으로 유배 왔던 추사 김정희였다.

제주에는 많은 유배 인물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독 추사 김정희가 떠오른 이유가 있다. 제주 서귀포 대정읍으로 유배됐던 그의 삶이 영화 속 단종의 영월 청령포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단종이 유배지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모습은, 제주 유배지에서 사람들에게 글을 알려주며 자신의 서체를 완성해 갔던 추사 김정희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과 찾은 대정의 추사관

서귀포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 전경. 추사 김정희의 유배 생활과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날도 역시나 바람과 구름이 가득했다.
▲서귀포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 전경. 추사 김정희의 유배 생활과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날도 역시나 바람과 구름이 가득했다. 이현숙

영화를 보고 난 뒤 떠오른 곳이 바로 추사관이었다. 그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가보고 싶었다. 지난 주말, 나는 아이들과 함께 서귀포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을 찾았다. 추사관은 김정희의 유배 생활과 그의 작품, 그리고 당시의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다. 추사가 실제로 살았던 집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어 그의 삶을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1840년 제주로 유배되어 약 9년 동안 대정에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단순한 고립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그 유배의 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국보 <세한도>다. 외로운 유배지에서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 바다를 건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전시관을 찬찬히 둘러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설명을 천천히 읽고 작품을 오래 바라볼 여유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몇 가지 장면 만큼은 아이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먼저 세한도의 전시 공간이었다.

"엄마, 저 그림 옆에 글씨는 어느 말이야? 뭐라고 써있어요?"


한글을 읽고 스스로 글을 적기 시작한 꼬마가 이 그림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김정희 할아버지가 소나무랑 잣나무, 집을 그린 그림이야. '가장 추운 때에도 너희는 우뚝 서 있구나'라는 뜻이래. 멀리 떨어져 있는 스승을 변함없이 찾아와 준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낸 그림 편지야."


추사관 전시실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아이들. 글씨가 예술이 되는 순간을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추사관 전시실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아이들. 글씨가 예술이 되는 순간을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이현숙

아이는 전시된 글씨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글씨가 예술이 된다는 사실이 신기한 듯했다. 추사 김정희의 삶과 추사관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소개하는 전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잠시 화면에 시선을 빼앗긴 아이의 시간 덕분에 잠시나마 전시 설명을 읽어볼 시간을 얻었다.

추사관 밖으로 나오자 또 다른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 머물렀던 제주 전통 가옥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마치 옛날 집을 탐험하듯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유배가 남긴 이름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 머물렀던 제주 전통가옥을 재현한 공간. 아이들은 옛집을 탐험하듯 천천히 둘러봤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 머물렀던 제주 전통가옥을 재현한 공간. 아이들은 옛집을 탐험하듯 천천히 둘러봤다. 이현숙

대정은 지금도 제주에서도 바람이 거센 곳으로 유명하다. 섬의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이곳이 유배지였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이 먼 섬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주로 유배 왔지만, 그 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예술로 남긴 사람은 많지 않다. 추사 김정희는 그 시간을 원망하기보다 글씨와 학문으로 채워 넣었다. 어쩌면 그 고독한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추사체도 탄생했을지 모른다. 추사 김정희는 그렇게 유배지에서 자신의 예술을 완성했다.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머물렀던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남겨진 이름은 더 오래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제주를 여행하다 대정을 지나게 된다면, 잠시 추사관에 들러보기를 권하고 싶다. 특히 올해는 조선 후기의 대표 서예가 김정희, 바로 추사의 탄신 24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에서는 지난 2월부터 <추사, 가문에서 피어난 예술> 특별전을 열고 있다.

바람 많은 제주에서 완성된 한 사람의 글씨를 바라보며, 우리는 그가 유배지에서 보냈던 긴 시간을 잠시나마 떠올려 보면 어떨까.
#제주살이 #추사김정희 #왕과사는남자 #제주유배지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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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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