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6)에서 발언하는 영국 활동가 호프 버고. 영국 섭식장애 권익운동가 호프 버고(Hope Virgo)가 2026년 3월 1일 잠수함토끼콜렉티브가 개최한 ‘한국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6)’ 온라인 세션에서 발표하고 있다. 이날 그는 영국에서 진행 중인 ‘#Dump the Scales’ 캠페인과 섭식장애 정책 개혁 운동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해당 세션 전체 영상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msHkU42_F4&t=4269s
잠수함토끼콜렉티브
강의 이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서 버고는 영국에서 진행 중인 '#Dump the Scales' 캠페인과 섭식장애 정책 투쟁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이 캠페인은 영국 의회의 '섭식장애 초당적 의원모임(APPG on Eating Disorders)'과 협력하며 정책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몇 해 전까지 영국 최대 섭식장애 자선단체 Beat가 맡았던 APPG 사무국 역할을 #Dump the Scales가 이어받으면서 버고는 정책 개혁 운동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매년 봄 영국 의회 앞에서는 이 캠페인이 주최하는 집회가 열린다. 환자와 가족, 연구자, 임상가, 정치인이 함께 모인다. 특히 영국 왕립정신과학회 섭식장애 분과 부의장인 정신과 의사 아그네스 에이튼(Agnes Ayton)이 형광 조끼를 입고 시위 현장에서 발언하는 장면은 상징적인 순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그러나 버고의 말에 따르면 영국에서도 이런 연대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영국 임상의들은 크게 두 집단으로 나뉩니다. 섭식장애 환자가 언제든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집단, 그리고 치료에 반응 없이 5년이 지나면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집단입니다."
활동가들이 맞서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관점이다.
그는 일부 임상의들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이유도 설명했다. 섭식장애 사망 사건의 책임 문제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캠페인을 하면 과거의 나쁜 의료 관행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누군가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실패하고 있는 현 시스템을 바꾸는 일입니다."
균열이 드러난 NHS
이 운동이 시작된 계기 중 하나는 정보공개청구(FOI)를 통해 드러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일부 국민보건서비스(NHS) 지역에서 체질량지수(BMI)가 11 수준인 환자들이 퇴원 조치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은 약 40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입원 병상은 약 455개에 불과하다. 치료 인력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
그 결과 NHS에서는 이른바 'BMI 게이트키핑'이라는 관행이 등장했다. 환자가 충분히 위중한 상태가 되어야만 치료 시스템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이러한 상황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치료 서비스가 부족할수록 환자는 더 심각한 상태가 되어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치료의 실패는 환자의 '회복 불가능성'으로 해석된다.
버고는 이렇게 말했다.
"섭식장애 인식 캠페인에서는 종종 연대와 긍정적인 메시지가 강조됩니다. 하지만 거기서 가려지는 건,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죠."

▲“섭식장애는 말기 질환이 아니다”… 치료 접근성 논쟁 다룬 국제 온라인 토론. 섭식장애를 ‘말기 질환’으로 규정하는 논쟁과 치료 접근성 문제를 다룬 온라인 토론 영상의 유튜브 썸네일. 이 토론은 2024년 8월 Eat Breathe Thrive Foundation for Eating Disorders가 주최했으며 제임스 다운스(James Downs), 아그네스 에이튼(Agnes Ayton), 아니타 페데리치(Anita Federici) 등 연구자와 임상의,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BzrCl7fd2o
Eat Breathe Thrive
'말기 거식증'이라는 논쟁
이 문제는 최근 등장한 '말기 거식증(terminal anorexia)' 논쟁과도 연결된다.
2022년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가 발표한 논문은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거식증 환자 즉, '양질의 치료'를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30세 이상의 거식증 환자'이면서 '추가 치료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는 의사결정 능력을 가진 환자'를 '말기'로 규정하고 완화 치료(palliative care)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연구자와 당사자들의 강한 비판 끝에 결국 철회되었다.
비판의 핵심은 단순했다. 치료의 실패를 환자의 회복 불능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연구자인 제임스 다운스(James Downs)는 이 논쟁을 이렇게 정리했다. 문제는 질병 자체가 아니라 치료 시스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한 치료 기회가 제공되지 않은 상황에서 환자를 '말기'로 규정하는 것은 의료 시스템의 실패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같은 병, 다른 운명
버고는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영국 보호법원에서 '패트리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환자의 사건이다. 그는 오랫동안 거식증을 앓아왔고 법원은 한때 그를 사실상 '치료 불가능' 상태로 판단했다. 그 결정에 따라 치료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1년 뒤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가족이 다시 법원에 사건을 제기했다. 이번에는 다른 판사가 사건을 맡았고, 그는 이전 판결을 뒤집었다. 환자는 다시 섭식장애 전문 병동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같은 사건이지만 판사의 판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두 번째는 웨일스 출신의 몰리 레너드의 이야기다. 그는 십대 시절부터 거식증을 앓았지만 대학 진학 이후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 거주지 인근의 전문 치료 시설에 입원할 수 있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자 전문 서비스가 거의 없어 수백 마일을 이동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결국 회복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같은 질병. 그러나 완전히 다른 결과.
버고는 이것이 개인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영국에서는 흔히 'postcode lottery'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거주 지역의 우편번호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수준이 달라지는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전문 치료가 가능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치료 접근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우리가 어디에서 그들을 실패시키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영국 섭식장애 권익운동 ‘#Dump the Scales’ 행진 안내 포스터. 영국 섭식장애 권익운동 ‘#Dump the Scales’가 2026년 4월 18일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열리는 ‘Eating Disorder March’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 이 행진은 더 나은 치료 서비스와 정책 개혁을 요구하며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들과 가족, 의료진, 활동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대 행동이다.
Dump the Scales
가이드라인과 현실 사이
영국은 오랫동안 섭식장애 치료의 모범 사례로 여겨져 왔다. NICE 가이드라인이 정교하게 마련되어 있고 가족 기반 치료로 알려진 모즐리 모델 역시 이곳에서 발전했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임상 지침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의 치료 체계로 그대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NHS 현장에서는 예산 삭감과 인력 부족, 지역 간 격차가 치료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흔들어 왔다. 2010년대 긴축 정책 이후 정신건강 서비스 예산이 줄어들면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래서 #Dump the Scales 캠페인의 다음 목표는 단순히 개별 정책 하나를 수정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호주와 뉴질랜드처럼 예방, 조기 개입, 치료, 지역 서비스가 함께 작동하는 국가 차원의 섭식장애 전략(national eating disorder strategy)이다.
버고는 발표를 마치며 이렇게 말했다.
"총리나 보건부 장관이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들과 직접 마주앉아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예요."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아마 한국의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와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이 사회의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자리다.
※ 이 글은 약 3만 4천 자 분량의 원고를 축약한 버전입니다. 전체 글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원문에 포함된 주요 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환자 시민성과 질병의 노동
○ 보이지 않는 노동
○ 호프 버고와 #Dump the Scales
○ NHS 섭식장애 치료 체계의 붕괴
○ 조력 사망과 '말기 거식증' 논쟁
○ 치료 불가능성이라는 신화
○ 같은 병, 다른 운명
○ 가이드라인과 현실 사이
○ 환자에서 정치적 주체로
○ 우리는 살아 있고, 우리 스스로 말한다
▶ 전체 글 보기: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lt-10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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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NHS도 무너졌다… 섭식장애를 둘러싼 또 하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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