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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이 뿌린 '보국안민'의 씨앗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 10] 수운으로 인하여 근대적 민족주의사상이 움트게 된 것이다

등록 2026.03.11 15:10수정 2026.03.1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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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주둔지 남원 깃대바위 남원 깃대바위는 남원시 이백면 남계리 쪽뜰에 위치한 동학군 주둔지 즉 군영이다.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이 주둔 및 훈련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보국안민, 척왜양창의 깃발을 꽂았던 바위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 유명한 동학농민혁명 최후 전투지의 하나인 '방아치 전투'지가 있다. 이 사진은 안경엽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제공하였다.
▲동학군 주둔지 남원 깃대바위 남원 깃대바위는 남원시 이백면 남계리 쪽뜰에 위치한 동학군 주둔지 즉 군영이다.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이 주둔 및 훈련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보국안민, 척왜양창의 깃발을 꽂았던 바위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 유명한 동학농민혁명 최후 전투지의 하나인 '방아치 전투'지가 있다. 이 사진은 안경엽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제공하였다.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1860년은 대한제국이 1910년 국치를 당하기 반세기 전이다. 그가 사형당한 지 2년 후 (1866년) 병인양요, 7년 후 (1871년) 신미양요, 11년 후 (1874년) 운요호사건과 이듬해(1875년) 강화도조약으로 개문납적(開門納賊)의 변이 시작되었다.

수운이 <검결>을 짓고 칼노래를 부른 것을 두고 지배집단은 '반역'으로 다스리고 끝내 목을 졸라 죽였다. 지배집단과 관리들이 하지 못한 개혁(개벽)을 종교인이 나섰다가 목숨을 잃고 다수의 제자들이 변을 당하였다.

하지만 수운이 뿌린 동학의 싹은 모진 탄압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도통이 해월 최시형에게 이어지고 민중의 가슴에 뜨거운 주체성을 심어주었다. 백성들이 반만년 주종(主從) 관계의 수직적 신분의식을 떨치고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동학도가 중심이 된 복합상소와 교조신원운동이고, 동학농민혁명이고 의병투쟁에 이어 기미년 3·1혁명으로 폭발하였다.

우리 근현대사의 거대한 민주적 변혁운동의 중심에는 동학 3인의 교주가 제시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수운의 '시천주(侍天主)사상', 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사상', 의암의 '인내천(人 乃天)사상'이 맥을 이루었다. 이것은 동학농민혁명⟶3·1혁명⟶민주공화제로 이어지고 현대의 인권사상으로 접맥되었다.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우리가 잃어버린 용어 중에는 인민·동무와 함께 주체사상(주체성)도 포함된다. 수운의 시천주는 주체적인 자아 곧 백성이 주인이 되는 후천개벽의 새시대상을 제시하였다.

동학은 다른 종교창도자들이 내세론과 윤회설을 내세운데 비해, 현세론을 제기하였다. 광제창생·제폭구민·보국안민이 그것이다. 이를 위하여 개개인이 주체성을 갖고 후천개벽을 통해 지상천국을 이룩하자는 주장이다.

동학은 내세보다는 현세를 위주로 하고 사후의 천당이나 극락이 아니라 한울 사람으로 자아를 완성하고 지상신선, 지상천국건설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현실을 바르게 보고 해야할 일을 바르게 하여 적극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고 있다.( 임형진, <동학의 정치사상>, 68쪽, 모시는 사람들, 2002)


이러한 동학의 '현세성'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곧 참담한 보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동학을 창도한 수운이 추구한 후천개벽의 '현세성'은 특정세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존공생이었다.

수운의 무극대도를 갈망하던 가장 큰 원인은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수운이 원하는 사회는 외부의 침략이 없는 태평성대 속에서 양반과 상민, 적자와 서자의 구별도 없고 병고도 없는, 백성이 항상 편안한 사회였다. 시천주 신앙에 의해서 하늘 뜻에 순종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이웃을 공경하고, 도성입덕(道成入德)하여 모두가 현인군자되어 이 땅 위에서 신선이 되는 사회를 꿈꾸었을 것이다.(이경숙 외, <한국생명사상의 뿌리>, 85쪽,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1)


동학을 창도한 수운의 생애는 그 자체가 19세기 조선의 역사적 체험을 통해 전환기적 세기말적 고뇌를 전형적으로 체현하고 있었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수운의 생애와 그의 동학사상은 낡은 왕조의 운명에 종언을 고하고 무너져가는 동아시아 질서 이른바 '천하'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 보국안민책의 모색이었다.

그 점에서 최수운은 서구문명의 침투와 근대적 민족국가형성을 위한 사상운동의 시대적 과제를 선각자로서 고민했고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슬로건을 통해서 낡은 지배층인 양반에 대치할 수 있는 '보국의 주체'로서의 과제를 아래로부터 널리 민중의 것으로 만들었고 '시천주' 사상을 통해 소외되었던 민중들을 내면적으로 '한울님을 모신' '군자(君子)'로 거듭 탄생케 한 것이다. (신일철, '수운의 역사의식', <최수운연구>(한국사상12), 15쪽, 한국사상연구회, 1978)

수운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학 일변도의 척박한 풍토에서 '양반에 대치할 수 있는' 세력으로 민중을 내세우고 각성시켰다. 차츰 각성된 민중은 주체성을 갖게 되고 나아가 민족의식으로 발현되었다. 수운으로 인하여 근대적 민족주의사상이 움트게 된 것이다.

한말 외세의 침탈로 나라가 온통 위기에 내몰리고 있을 때 조정과 유생들의 대처방식은 종주국(청국)에 의존하는 길 이외의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서양 제국에 의해 몇 갈래로 찢기고 붕괴 과정에 이르자 아연실색, 천주교 탄압뿐 이렇다 할 방책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조선사회는 외교력과 사상이 부재하는 황무지 상태에 빠졌다. 그 무렵에 나타난 것이 동학사상이다.

근대 한국사상에 대한 관심은 동학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사상의 연구에 있어서 근대 사회의 전환기를 앞두고 표출된 동학사상을 도외시하고는 성립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동학사상이 한국사상 오랜 옛날부터 지녀온 전통적인 사상과 외래의 여러 사상을 접하는 가운데 이를 전승 내지 포용하고 더욱 창조적인 지양을 보여줌으로써 동학사상이 곧 근대한국의 민족사상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학사상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줄기차게 영향력을 나타내 왔다는 데서 많은 관심의 초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익제, '동학사상 연구의 방향', <한국사상 제18집>, 42쪽, 한국사상연구화, 1981)
덧붙이는 글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횃불 #촛불 #응원봉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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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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