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지리산 뒤로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보인다.
정도길
단체대화방에 실시간으로 뜨는 메시지는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방수 등산화와 아이젠 등 겨울 산행에 필요한 장비를 철저히 준비하라는 것을 전달 받으면서다. 겨울의 끝을 밀어내고 들어선 봄은 곳곳에서 그 기운을 체감 하는지라, 다소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혹여나 싶어 밖으로 나가보니 몸이 얼어붙을 만큼 찬 영하의 날씨로 과한 주문이 아니었다. 집 한편에 두었던 장비는 배낭으로 옮겨졌다.
지난 7일, 처음 지리산둘레길 생명평화 지리산 순례에 참가했다. 지리산 성삼재 휴게소에서 노고단을 산행 하는 코스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 전북 남원시 산내면을 초입으로 구례군으로 향하는 861번 지방도를 타야 한다. 뱀사골과 달궁 계곡을 지나 정령치로 가는 삼거리에 출입 금지문과 차단 시설까지 설치해 놓았다. 도로와 산자락에 녹지 않은 잔설을 보니 실감이 났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길바닥은 미끄럽고, 내려오는 차와 충돌을 피하려 운전에 집중해야만 했다.
상고대로 갈아 입은 환상적인 풍경
핸들을 꽉 잡았던 긴장감은 휴게소 주차장에 들어서야 풀렸다. 쌓인 눈은 상고대로 갈아입어 환상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얼굴이 얼 정도로 바람도 세차다. 복장준비를 단단히 챙기고 회원들과 첫 인사를 나눴다. 다들 중무장(?)한 상태라 얼굴을 볼 수가 없었기에 검은색 복면 마스크를 벗어야 했다. 이날 단체 산행을 책임진 목사님의 당부 말씀으로 산행은 시작됐다.

▲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노고단으로 가는 길.
정도길

▲노고단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길.
정도길
등산로는 비상시 차량이 다닐 정도로 폭이 넓고 걷기에도 편하게 만들어져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그만큼 눈이 많이 쌓였고, 집중을 기울여야만 했다. 아이젠을 신은 등산객도 있지만, 아직은 괜찮다. 나목에 앉은 눈은 아침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한다. 마치 오후 햇살이 강하게 비친 호수의 반짝거림과 유사한 풍경으로 최상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참가자 연령대와 체력이 달라서인지 일행은 몇 팀으로 떨어져 걷는다. 앞서서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니 정상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듯하다. 예쁜 모습을 한 눈꽃은 잎사귀 하나 없는 나뭇가지가 새싹을 틔우려는 의지를 꺾으려 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다시 보니, 눈 녹은 물기를 받은 그는 새 생명을 잉태하려 애쓰고 있다.

▲눈꽃 짙푸른 하늘색과 조화를 이루는 눈꽃.
정도길
노고단으로 향하는 길은 두어 군데가 편안한 길과 지름길로 만들어져 있다. 평소 산행 습관으로 오를 때는 빠르게, 내려 갈 때는 여유롭게 걷는 편이다. 계속되는 가파른 돌계단은 숨을 차게 한다. 복면 마스크를 벗고 바위에 앉아 따뜻한 물 한 잔을 들이켜니 살 것만 같다.
겨울 산행은 준비가 철저히 해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해 준다. 산죽도 눈을 이고 잎이 축 처져 무게를 감당하며 버텨내고 있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니 짙푸른 색과 하얀 눈의 대비가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천왕봉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정도길
숨이 멈추는 느낌이다. 가슴이 떨리고 흥분이 일어난다. 노고단 고개에 올라 보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은 25km나 떨어져 있어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다. 쾌청한 날씨로 열 개가 넘는 봉우리를 연결하는 주능선도 선명한 모습이다.
이런 장면을 마주하면 무슨 단어로도 표현하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환상적이다거나 몽환적이라는 표현도 부족해 보인다. 20년도 넘었던 때였을까, 매서운 추위를 뚫고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가지산에 올라, 귤 한 조각의 단 맛을 본 후 두 번째로 느끼는 절정의 느낌이다.
지리산의 장엄함
천왕봉으로 가는 출입문은 굳게 닫혔다. 겨울철 산불 예방과 안전 산행을 위해 지난 2월 10일부터 오는 4월 30일까지 탐방로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지리산 종주 때 나들었던 문을 뒤로 하고 노고단을 향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노고단 산행은 사전 예약이 필수적이다. 전날 국립공원 시스템에 예약을 마친 상태라 카카오톡으로 받은 QR코드 확인을 거쳐 출입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노고단 노고단 고개에서 정상까지는 이어지는 목재 계단 길.
정도길
문을 지나 정상까지는 목재 계단으로 이어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는 넓어지고 사방은 하얀 세상이다. 조선 시대 눈 내린 풍경화 중 김정희의 <세한도>는 겨울의 삭막함과 선비의 곧은 절개를 표현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노고단의 설경은 <세한도>와는 달리 엄동설한 속에서도 포근함을 느끼게 해 주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해도 손색 없다. 필요에 의해 자리를 차지한, 보기에도 거슬리는 쇳덩어리 철탑도 눈 옷을 입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노고단 해발 1,507m 노고단 정상.
정도길
1시간 남짓 걸어 노고단 정상에 올랐다. 칼바람이 몰아치고 얼굴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잠시 벗었던 복면 마스크를 다시 쓰려고 찾았지만 없는 것을 보면 어디에서 흘린 모양이다. 두터운 장갑을 꼈지만 손가락 끝은 바늘을 찌르는 고통 이상이다. 최근 동영상 편집 과정을 배우는 과정에 있지만, 영상 촬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풍경사진 몇 장으로 기록을 남겼다.
자연의 숭고함을 배운 시간

▲섬진강 노고단 정상에서 희미하게 바라다 보이는 섬진강.
정도길
노고단(해발 1507m)은 노고할미라 불리는 산신에게 평안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던 곳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 서쪽에 위치한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 3대 주봉으로 꼽힌다. 이 세 봉우리는 지리산 주능선의 핵심으로 영봉의 의미를 가지며 웅장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지리산을 찾는 이라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산행지로 선택 받고 있다. 흔히, 설악산은 아버지 산이라 부르고, 지리산은 어머니의 품이라 불린다. 저 멀리 아래로 강한 햇살 속에 희뿌옇게 보이는 섬진강이 유유히 흐른다.

▲생명평화 순례단 지리산둘레길 생명평화 순례단.
정도길
지리산둘레길 생명평화 순례는 강한 여운을 남겼다. 추위를 견디면서 겨울 지리산의 환상적인 풍경에 넋을 잃었다. 천왕봉을 100회도 넘게 올랐고 지리종주도 수차례 거쳤지만, 이날 노고단의 기억은 영영 잊히지 않을 추억으로 남을 것은 분명하다. 행사를 주관하고 안전 산행을 위해 애쓰신 목사님과 도반님들에게 이 글을 통한 감사한 마음을 전함과 동시에, 사정상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지리산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자연 생태의 보고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의 마을과 사람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생명 평화 순례는 한 걸음 또 한 걸음에 의미를 두고 생명의 중요성과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며 걷고 있다. 지리산에 자생하는 모든 동식물의 안녕을 기원하며 다음 순례를 기대해 본다.

▲눈꽃 노고단 정상 주변에 피어 난 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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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핀 지리산 눈꽃, 가슴 떨리는 절경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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