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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6.03.10 14:48수정 2026.03.10 14:48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앞만 보고 걸으면 볼 수 없는 꽃이 있다. 그리고 인연이 닿아야 비로소 보이는 꽃이 있다.
며칠 전 하루 종일 봄비가 내렸다. 잘고 길게 내린 비는 땅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뭇 생명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말짱하게 개인 하늘을 보니 몸속의 핏줄까지 팽팽하게 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날은 어디든 나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탑영제(수변호수) 멀리 암, 수 마이봉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 좀 더 오르면 마이산 탑사와 은수사가 나온다
유상신
지난 3일 남편과 함께 전북 진안의 마이산으로 향했다. 우리가 자주 걷는 길. 내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마이산 줄넘기 코스'를 걸으려는 것이다. 마이산 남부주차장에서 출발해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 고개를 넘어 북부 주차장 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다. 마치 줄넘기를 하듯 한 번 넘어갔다 돌아오는 코스라 그렇게 부른다. 땀을 흠뻑 흘리며 고개를 넘어가 점심 먹고, 카페에서 책을 읽은 뒤 다시 땀 흘리며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함께 개운해지는 하루 코스다.
봄비가 충분히 내렸으니 혹시 봄 야생화라도 세상 구경을 나왔을까 싶어 주변을 둘레 둘레 살피며 걸었다. 나뭇가지마다 잎 눈과 꽃 눈이 제법 도톰하게 올라와 있었다.
'한 달쯤 지나면 툭툭 잎이 터지고 꽃들이 벙글겠지.'
상상만으로도 얼핏 봄을 먼저 만난 듯 기분이 좋아졌다.

▲마이산 탑사 마이산 남부주차장에서 약 1.9km 떨어진 곳에 위치, 이갑용 처사가 쌓은 80여개의 돌탑으로 유명하다
유상신

▲은수사 태조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올린 역사유적지이자, 금척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천명한 곳이다. 건물 뒤로 왼쪽 암마이봉,오른쪽 수마이봉이 보인다. 그 사이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고개마루(천황문)에 이르고 넘어가면 북부주차장이 나온다
유상신
탑사를 지나 은수사를 지나면 마이산 고개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온다. 최근 시작한 파워 스트레칭 때문인지 다리에 근육통이 심해 몇 걸음 오르다 쉬어야 했다. 꾸준히 운동해 온 남편은 성큼 성큼 쉬지 않고 올라갔다. 어차피 따라잡을 수 없다면 '따로'가 낫다 싶어 마음 편히 뒤처지기로 했다.
마이산에서 바람꽃을 만나다
몇 계단 오르다 보니 계단 옆 산기슭에 '마이산 지질 명소에 사는 꽃들'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혹시 지금 쯤 피는 봄꽃이 있을까 하는 기대에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고깔제비꽃, 구슬봉이, 단풍제비꽃, 때죽나무, 얼레지, 큰개별꽃, 큰괭이밥, 생강나무, 현호색….

▲'마이산 지질명소에 사는 꽃들' 표지판 마이산에 서식하고 있는 꽃들을 소개하고 있다. 반가운 이름, 바람꽃도 들어 있다
유상신
익숙한 이름들 사이에서 눈길을 붙잡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바람꽃. '마이산에 바람꽃이 있다고?'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바람꽃은 야생에서 꼭 한 번 자연스럽게 만나보고 싶던 꽃이었다.
오래전 함께 근무하던 선배 교사 한 분이 있었다. 그는 이른 봄이 되면 변산 바람꽃을 보러 간다며 자신만 아는 장소로 바람처럼 훌쩍 떠나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처음 듣는 그 꽃이 궁금했다. 어느 해 봄, 큰 용기를 내어 "저도 한번 따라가도 될까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정중한 거절을 받았다. 조용한 성품의 그는 아마도 일 년을 기다려 온 그 꽃을 혼자 조용히 보고 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서운하지는 않았지만, 바람꽃에 대한 궁금증과 갈증은 오히려 더 커졌다.
귀촌 후 꽃밭이 생기자, 변산 바람꽃은 아니지만 바람꽃 종류의 모종을 사다 심은 적이 있다. 환경이 맞지 않았는지 꽃도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바람꽃이 지금 내가 서 있는 마이산 어딘가에 살고 있단 말이지.'
그 보물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다. 바로 그때였다. 낙엽 사이에서 작은 흰 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 저 꽃!"

▲변산 바람꽃 변산 바람꽃은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개화 시기는 2월~3월초이고 바람처럼 짧지만 강한 생명의 꽃이다. 전날 비가 와서 물방울이 맺혀있다.
유상신

▲변산 바람꽃 변산 바람꽃은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개화 시기는 2월~3월초이고 바람처럼 짧지만 강한 생명의 꽃이다. 전날 비가 와서 물방울이 맺혀있다.
유상신

▲변산 바람꽃 변산 바람꽃은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개화 시기는 2월~3월초이고 바람처럼 짧지만 강한 생명의 꽃이다. 전날 비가 와서 물방울이 맺혀있다.
유상신

▲변산 바람꽃 변산 바람꽃은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개화 시기는 2월~3월초이고 바람처럼 짧지만 강한 생명의 꽃이다.
유상신

▲변산 바람꽃 변산 바람꽃은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개화 시기는 2월~3월초이고 바람처럼 짧지만 강한 생명의 꽃이다. 낙엽이 많이 쌓인 곳에 주로 서식한다.
유상신
사진으로만 보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다. 급히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니 틀림없는 변산 바람꽃이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너무 기뻐 팔짝 뛰다가 남편에게 보여주려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이미 계단 위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 예쁜 것도 못 보고 그렇게 빨리 올라가 버릴 건 뭐람.' 남편에게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 나 혼자라도 실컷 보다가 가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야생의 변산 바람꽃.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눈으로 찍고, 사진으로 찍고, 그저 바라보면서 "어머, 어머"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 다정한 중년 부부 한 쌍이 손을 잡고 내 옆을 지나갔다. 내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둘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손을 꼭 잡고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잠깐 부러울 뻔했지만, 눈앞의 바람꽃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금세 휘발돼 버렸다.
같은 것을 보았으나 서로 다르게 느끼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오면서 바람꽃 봤어요?"
남편은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쯤 피는 야생화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람꽃을 알 리도 없으니 낙엽 속 작은 꽃이 눈에 들어왔을 리 없다. 문득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남편과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고개 너머 카페에 앉아 책을 꺼낸 뒤, 남편에게 변산 바람꽃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발견한 기쁨을 다시 이야기했다. 남편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나는 빨강머리 앤처럼 기쁨과 아름다움은 크게 말할수록 더 커진다고 믿는 사람인 반면 남편은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속으로 음미하는 편이다.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 그것 또한 우리 부부의 서로 다른 모습이다.
마이산 고개를 넘어 다시 돌아오는 길. 남편이 걸음을 늦추며 주변을 살폈다. 사진을 보여준 덕분인지 바람꽃을 쉽게 찾아냈다. 그리고 한참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나처럼 크게 기뻐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남편도 속으로는 무척 반가웠나보다. 왜 안 그렇겠는가. 봄 야생화와 첫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아마 내년 봄이 오면 우리는 이 날을 떠올리며 이 길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때도 우리 부부는 지금처럼 '따로 또 같이' 걷겠지. 그리고 나는 크게 소리치며 기뻐할 것이고, 남편은 말없이 오래 바라보겠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작은 것에도 함께 기뻐하며 잘 나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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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책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은퇴 후 나의 하루는 내가 디자인하며 삽니다. 지금 여기에 사는 즐거움(기쁨이자 슬픔)을 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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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번거리기 좋은 요즘, 앞만 보고 걸으면 절대 볼 수 없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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