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일엔마프(수요일에 만나는 마을정책 이슈 브리프)'는 마을을 위한 정책 정보 레터입니다. 마을활동가, 행정 실무자, 관련 전문가 및 연구자들의 마을 분석과 대안적인 제안이 담긴 기획기사들과 국내외 혁신적인 마을 소식을 큐레이션 한 콘텐츠를 담아 매월 두 번째 수요일 발행돼 경기도마을공동체 지원센터 홈페이지에 게시됩니다.[기자말] |
지구 평균기온 상승 1.5℃ 방어선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폭염, 폭우, 과수화상병, 벼멸구 대발생으로 우리 농촌은 말 그대로 기후 재난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전 세계가 앞다투어 화석연료를 버리고 재생에너지로 달려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재생에너지 성적표는 OECD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재생에너지의 혁신을 오직 '기술'에서만 찾으려 했습니다. 태양광 패널의 발전 효율을 1~2% 끌어올리는 것, 풍력발전기의 기둥을 더 높게 세우고 블레이드를 길게 만드는 것만이 혁신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끼는 진실은 다릅니다. 재생에너지의 가장 위대한 혁신은 기술이 아니라 '구조'에 있습니다. 바로 주민이 재생에너지 사업의 대상이나 피해자에서 '주인'으로 입장을 바꾸는 것, 특히 개인이 아닌 '마을공동체'가 주체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이자 세계적인 모범입니다.
바닷가에 대규모 석탄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 전력을 생산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고, 전기를 소비하는 도시 중심의 공급 구조 속에서 발전소 주변 주민들의 삶과 역할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전체 재생에너지의 약 89%는 농촌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재생에너지는 농촌의 땅과 지붕 위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에너지입니다. 결국 주민이 주체로 참여하지 않는 재생에너지는 지속적으로 확산되기 어렵습니다.
외부 자본이 휩쓸고 간 상처, 농촌의 분노와 전력망의 붕괴
지난 몇 년간 농촌에 밀어닥친 태양광 광풍은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거대 자본과 외지 기업들은 수익성이 좋은 임야와 염해 간척지, 심지어 멀쩡한 염전까지 닥치는 대로 태양광 패널로 덮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체 농민의 75%에 달하는 소작농과 임차농들은 농지에서 쫓겨났습니다. 염전에서 평생 소금을 내던 염부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고, 이는 천일염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익은 기업과 땅 투기꾼이 독식하고, 훼손된 경관과 산사태의 위협, 삶의 터전 상실이라는 피해는 고스란히 농촌 주민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돈은 외지 기업이 벌어 가고, 우리는 피해만 보느냐"는 분노는 마을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태양광을 혐오시설로 규정하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가혹한 '이격거리 조례'를 만들어 저항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24년 9월, 한전은 전남, 전북, 경북 등 주요 지역에서 전력 계통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2031년까지 태양광 설치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주민의 동의 없이 거대 자본의 논리로만 질주했던 '주인 없는 재생에너지'는 결국 계통망 붕괴와 주민 수용성 악화라는 파국을 맞이한 것입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3대 혁신 : 여주시 구양리 햇빛소득마을 모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한 줄기 강력한 빛이 여주시 구양리에서 쏘아 올려졌습니다. 구양리는 단순히 마을에 태양광 패널 몇 장을 얹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마을공동체가 주인이 되어 기존의 파편화된 재생에너지 사업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는 '3대 혁신'을 일궈냈습니다.
① 협업형 혁신 (물리적 한계 극복)
넓은 폐염전이나 대규모 유휴지가 없어도 가능함을 증명했습니다. 구양리는 마을의 67가구 전체가 참여해 마을회관, 창고 지붕, 각 농가의 주택 지붕을 하나로 연결했습니다. 작은 개미들이 연대해 거대한 1MW 규모의 묶음 발전소를 구축한 것입니다. 이는 국토가 좁고 대규모 부지가 부족한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적용 가능한 가장 현실적인 모델입니다.
② 금융 모델 혁신 (자본의 한계 극복)
태양광은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는 '금융업'의 성격을 가집니다. 구양리는 정부의 무상 지원금에 기대지 않았습니다. 총사업비 17억 원 가운데 90%를 에너지공단의 저리 대출과 신협의 사회적경제 무담보 대출로 조달했고, 단 10%만 마을이 자부담했습니다.
마을이 주체가 되자 공공성이 담보됐고, 태양광 설비(동산)와 한전과의 장기 전기 판매 계약(수익권)만으로도 거액의 대출이 가능해졌습니다. 부동산 담보 없이 수익권만으로 자본을 조달하는 이 정교한 금융 설계는 사업의 높은 확장성을 보여줍니다.
③ 공동체 혁신 (분배와 재생의 선순환)
가장 위대한 혁신입니다. 구양리의 1MW 발전소는 매월 평균 2500만 원의 매출을 올리며, 빚을 갚고도 월 1000만 원의 순이익을 냅니다. 신안군 모델이 외부 기업 주도 아래 주민이 4%의 이익만을 공유(피해 보상적 성격)했다면, 구양리는 마을 주민 100%가 출자하고 소유해 수익률이 약 25배 높습니다.
이 수익은 단순히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체 기금을 형성해 무료 마을식당을 만들었고, 조리장 2명과 조리종사원 3명, 마을 무료 미니버스를 운영하는 마을 사무장까지 총 6명의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심수봉과 에녹의 콘서트를 함께 관람하고 마을여행을 무료로 다니는 등 공동체를 복원하는 기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혁신 중의 혁신 : '주민 주도 시스템'이 가져온 마법
구양리 모델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마을공동체를 사업의 주체로 세운 것'입니다. 개인이 발전소를 지으려 하면 땅을 구하기도, 대출을 받기도, 계통을 연결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그러나 마을이 주체가 되면 막혔던 모든 문이 열립니다.
① 공공성의 확보와 국가 자원의 활용
개인의 영리 사업이 아니라 마을의 자산이 되므로, 국가 공공 자원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습니다. 농어촌공사가 보유한 비축 농지(전국 1만 5000ha)나 고속도로·철도 유휴지 등을 마을공동체 발전소에 임대해 준다면, 수만 개의 1MW급 마을 발전소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② 계통망 문제의 근본적 해결(지산지소)
한 곳에 1GW의 거대 발전소를 지으면 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송전탑을 세워야 하고, 평균 80개월의 갈등과 천문학적인 비용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1000개의 마을이 각각 1MW씩 발전하여 마을에서 직접 소비(지산지소, 마이크로그리드)한다면, 부족한 국가 전력계통망에 대한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이는 한전의 재정 부담을 완화하고 전기요금 인상 압력을 낮추는 데에도 의미 있는 대안이 될 것입니다.
마을공동체가 완성하는 5단계 에너지 발전 로드맵
마을이 에너지를 생산하게 되면, 농촌은 단순히 전기를 파는 곳을 넘어 스스로 진화하는 하나의 완결된 에너지 시스템(마이크로그리드)으로 성장합니다. 구양리가 제시하는 비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에너지 복지) : 햇빛 발전 수익으로 마을의 취약계층을 돕고, 냉난방비 걱정 없는 에너지 복지 마을을 실현합니다.
2단계 (에너지 자립): 마을회관 지붕 태양광 등을 통해 마을에서 사용하는 기본 전력을 100% 자급자족합니다.
3단계 (전력화 및 전동화): 화석연료를 쓰는 농기계를 전기 트랙터 등 친환경 기계로 전환하고, 저렴한 마을 전기 요금제로 직접 충전하는 체계를 구축합니다. 이는 저탄소 농산물 생산의 기반이 됩니다.
4단계 (귀농·귀촌 지원 에너지 플러스): 마을 발전소의 용량을 늘려 귀농하는 청년들에게 200kW, 전업농에게 100kW의 영농형 태양광 쿼터를 나누어 줍니다. 안정적인 소득 창출로 귀촌 인구를 폭발적으로 늘립니다.
5단계 (햇빛소득 기반 에너지 기본소득 및 마이크로그리드 완성): ESS(에너지 저장장치)와 연계하여 마을 단위의 완벽한 생산-소비 균형을 맞추고, 전 주민에게 국가 재정이 투입되지 않는 자립형 '에너지 기본소득'을 지급하여 지방 소멸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지자체를 혁신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정책 제언
이 완벽한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되기 위해 남은 마지막 퍼즐은 바로 '지방자치단체의 변화'입니다. 주민과 가장 맞닿아 있는 지자체가 이 사업의 든든한 바람막이이자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을공동체 활동가 여러분은 지자체를 향해 다음 정책들을 강력히 요구해야 합니다.
① 리더 그룹 전문 교육 의무화: 마을의 변화는 리더의 각성에서 시작됩니다. 이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등 의사결정권자들에게 구양리 모델의 성과와 금융 조달 방법을 알리는 전문 교육을 정례화해야 합니다.
② 행정 원스톱 서비스 데스크 신설: 복잡한 인허가, 법인(협동조합) 설립, 금융 컨설팅을 한 번에 해결해 주는 지자체 전담 부서가 필수적입니다. 노인이 대부분인 마을공동체가 복잡한 서류 작업에 지쳐 포기하지 않도록, 지자체가 실무를 대행해야 합니다.
③ 지자체 보유 공유 자원의 과감한 개방: 지자체가 관리하는 주차장, 지방도 사면, 유휴 공공부지를 마을공동체 발전소 부지로 우선 제공하여 사업의 마중물을 부어야 합니다.
결정적 유인책 : '지방교부세 차등 지원' 제도의 도입
구양리 모델의 유일한 단점은 역설적으로 "정부 예산이 한 푼도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직 대출과 자부담으로 굴러가는 수익 사업이다 보니,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예산을 따올 필요도 없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할 동기가 부족한 '주인 없는 사업'으로 방치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각 지자체가 '햇빛소득마을'을 얼마나 많이 육성했는지, 재생에너지 마이크로그리드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구축했는지를 평가하여 지방교부세를 파격적으로 차등 지원해야 합니다. 이는 공무원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마을공동체를 돕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당근이자 채찍입니다.
미약한 개인이 모여 창조하는 거대한 생명력
마을공동체 활동가 여러분, 우리가 마주한 농촌은 노인들만 남아 쇠락해 가는 소멸의 공간이 아닙니다. 농촌은 대한민국의 기후위기를 극복할 에너지를 품은 가장 넓은 대지이며, 어르신들은 그 에너지를 길어 올릴 강력한 주체들입니다.
개인은 미약합니다. 거대 자본과 복잡한 법망 앞에서 쫓겨나는 농부와 염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이름으로 뭉치면 국가의 법과 금융 제도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입니다. 자본 없이도 수십억 원의 자산을 굴리는 발전사업자가 될 수 있고, 이웃과 함께 민주적으로 수익을 나누며 붕괴된 마을의 자치를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지구를 살리는 일과 내 지갑을 채우는 일, 그리고 쓰러져 가는 우리 마을을 살리는 일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여주시 구양리가 쏘아 올린 희망의 증거를 이제 전국의 모든 마을로 번지게 해야 합니다.
마을공동체가 재생에너지의 확고한 주인으로 우뚝 서는 날, 기후위기와 지역소멸이라는 두 거대한 파도를 잠재우고 대한민국의 진정한 에너지 독립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농촌 재생의 위대한 역사, 그 맨 앞줄에 마을공동체 활동가 여러분이 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최재관(한국에너지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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