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신사 최시형 상(像) 동학 천도교 제2세 교주 해월신사 최시형은 동학혁명(2차 기포)을 주도하다가 포덕 39(1898)년 4월 5일(음)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 피체되었다. 해월신사는 동년 6월 2일 향년 72세로 경성감옥에서 순도(순국)하였다. 이 좌상은 순도 직전의 최후 모습으로, 천도교 동학혁명1백주년기념사업회에서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하여,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에 천도교 종법사 김창업 선생의 특성금으로 세웠다.
동학혁명기념관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가 대구감영에서 사형당하기 한 해 전인 1863년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조대비에 의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고종)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게 되었다. 대원군의 시대가 열렸다.
1862년 2월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이른바 '임술민란'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고, 1864년 11월에는 경기·충청·황해 3도에서 화적떼가 민가를 약탈하는 등 국정은 혼란스러웠다. 대원군은 집권하여 일대 개혁정책을 시도했으나 중축이 부러지고 곪을 대로 곪은 국정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실책도 적지 않았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를 제어하고 당쟁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사색(四色)을 신분·계급·출생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등용했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파직시켰다. 국가재정을 좀먹고 당쟁의 소굴이 되고 있는 서원을 47개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함으로써 민생을 다소 안정시키고 국고도 충실하게 만들었다.
또한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의 법전을 편수,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강을 수립하는 한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했다.
실책으로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원납전을 발행하여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1866년(고종3) 병인양요를 일으킨 데 이어, 국제정세에 어두운 나머지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1871년 신미양요 등이 발발함으로써 국제관계를 악화시키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했다.
정부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교조를 처형한 조정은 '그 잔당'을 소탕하고자 관헌을 풀어 동학도를 닥치는대로 검거하고, 동학을 적대시해온 지방의 유생들은 이 기회에 '주자학의 이단세력'을 뿌리 뽑고자 은신중인 신도들까지 관에 발고하였다.
이조 봉건정부의 동학신도에 대한 추궁은 초대 교조 처형 후에도 일관해서 엄중하게 계속되어 가장 고난이 많은 시대로 교의(敎義)는 관헌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상민(평민) 출신인 최시형은 2대 교조로서 전전히 체포를 피해가면서 그 실무를 조직력에 의해 농민들 층으로 점차 전국적인 비합법적인 교단조직을 쌓아 올라갔다.(오지영, <동학사>, 102쪽, 1938, 문의각)
최시형이 제2대 교조가 되어 동학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 시기는 중년에 접어드는 38세 때이다. 그에게는 교조의 억울한 죽임을 풀어주는 신원운동과 함께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려는 동학의 창도정신을 구현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졌다. 또한 시급한 것은 교조가 남기고 간 말씀과 글을 묶어 간행하는 일이었다. 쫓기는 처지에서 어느 것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의 추적을 피해 산간마을에 은신하면서 포교활동을 계속하였다.
기독교의 구약에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이며 가나안을 찾았다지만, 최시형은 1898년 원주에서 관군에 체포될 때까지 35년을 쫓기는 신분으로 동학을 지키고 확산하고 각종 사료를 펴냈다.
주인(主人)은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애통하여 어디로 행할 바를 모르다가, 영덕 직천(直川)에 있는 강수(姜洙)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강수는 마침 풍습(風濕)이 다 낫지 않아 초당(草堂)에 누워 있다가, 놀라 주인의 손을 잡고, 선생께서 당한 욕(辱)의 전후사를 듣고 슬피 눈문을 흘리며 애통해 했다. 강수의 처 박씨도 대성통곡을 하였다.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다가 새벽에 밥을 지어 밥 한 바리를 싸서 새벽에 나아가 동쪽으로 향했다. 마을의 닭들이 사방에서 울고, 마침 비가 내려 머뭇거리다, 중도에 영해(寧海)에 이르러, 도인의 집을 찾아 잠을 자고, 다음날 길을 떠나 평해(平海) 황주일(荒周一)의 집에 이르렀다.('도원기서', 121쪽)
최시형은 동학에 입도한 이후까지도 아명인 최경상으로 불리다가 49세 때인 1875년 10월(음) "도(道)는 때를 따르는 데 있으니 때에 따라 나가야 한다(用時用活)"고 하여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해월이란 호는 1863년 수운으로부터 '해월당(海月堂)'이란 도호를 받으면서 사용한 것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스승이 순도한 뒤 최시형은 영양의 일월산 기슭 용화동 마을에 은거하며 매일 짚신 두 켤레를 삼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업이었다. 관의 추적을 피해 언제라도 피신할 수 있도록 항상 짚신 한 켤레와 밥 한 끼를 넣은 봇짐을 옆에 두어 뒷날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1세 교조가 참변을 당하고 동학의 지도자들 다수가 잇따라 처형·투옥되거나 자취를 감추면서 일반 도인들은 분노에 떨었다. 그런 가운데 최시형이 용화동 마을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이 일부 도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곧이어 대선사(최제우)의 부인과 아들 등 유족이 이곳에 도착하여 이웃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최시형은 대선사의 유족 돌보기를 가족보다 먼저하였다. 이들도 포교들의 눈을 피해 거처를 수시로 옮겨야 했다.
해월은 자기네 식구와 함께 최제우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와서 울진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짚신도 삼고 농사도 지으면서 두 집 살림을 꾸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머슴살이로 단련된 솜씨를 보였고 타고난 근면성으로 농사일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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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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