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 스틸컷
엘 데세오
그 첫 징검다리는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 2003년도에 제작된 그 영화를 처음 본 것이 몇 년도였는지는 모르겠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고, 글쓰기 강의나 소설 창작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시 보고, 수업을 진행하면서 또 본 기억뿐.
여기에 나오는 피나 바우슈의 발레에 반했는데, 그 피나 바우슈가 두 번째 징검다리이다. 팬이 된 나는 마침내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게 되었다. 피나 바우슈가 작고한 다음 해인 2010년. 서울 역삼역 부근에 있던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려졌던 공연은, 영화 <그녀에게>에도 등장하는 <카페 밀러>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2차 대전 후의 상처 가득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듯, 넋이 나간 남녀가 의자들만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무대 위를 휘청거리며 걸어가다 실신하듯 쓰러지는 <카페 밀러>도 좋았지만, 최소한의 무대장치로 바닥에 깔린 진흙 위에서 격렬하게 군무를 추는 <봄의 제전>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때까지 나는 발레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무렵 으레 무대에 올려지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이 전부인 줄 알았다. 백조처럼 우아한 자태의 발레리나가 깃털처럼 펼쳐진 발레복 튀튀를 입고 새의 날갯짓처럼 하늘거리는 몸짓을 하는 무용 말이다. 피나 바우슈가 연출한 현대 발레는 전혀 달랐다. 의상도 몸짓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살색의 슬립을 입어서 거의 옷을 입은 거 같지 않은 여자 무용수들과 하의에 걸친 검은 스타킹만으로 흡사 검은 사제단을 연상시키는 남자 무용수들. 그 안에서 도드라지는 붉은 천. 공연이 시작되면 한 여자가 붉은 천 위에 엎드려 있다. 자신이 희생양일까 두려워하는 몸의 율동. 공포와 불안은 다른 여자들에게도 차례로 이어져, 한차례 씩 격렬한 몸짓을 토해낸다. 온몸을 비틀고, 상체를 빠르게 뒤로 꺾고, 쓰러질 듯 좁은 무대 위를 달려 나가고, 자해하듯 팔로 자기 복부를 찌른다.
강렬하게 두드려 대는 북소리와 함께, 흡사 대지의 진동인 듯 격렬한 몸의 떨림으로 이어지는 군무와 함께, 바닥에 깔린 진흙이 튀어 오르는 그 동시적 감각은 스트라빈스키라는 천재적인 작곡가의 음악이 피나 바우슈라는 탁월한 무용가에 의해 어떻게 재해석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풍요를 기원하며 처녀 한 명을 대지의 신에게 바친다는 고대 신화. 고대 신화는 왜 여성에게 특히나 어린 여성에게 이토록 잔혹한가. 그 잔혹함을 피나 바우슈는 무용수들이 추는 격렬한 춤으로, 무용수들의 율동에 드러난 고통의 생생한 감각으로 재현했다. 실존과 고통의 몸짓. 이것은 피나 바우슈의 전매특허 같은 키워드이다. 과연 스트라빈스키는 무슨 생각으로 이 곡을 작곡했을까?
20세기 가장 영향력 컸던 작품 중 하나

▲ 1975년 선보인 피나 바우슈의 ‘봄의 제전’
LG아트센터
혁신적인 발레 감독 디아길레프에게 스트라빈스키가 발탁된 것은 문화적으로 콧대가 높은 파리지앵들이 유럽 문화와는 다른, 좀 더 원시적이고 혁신적인 음악을 갈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새>의 대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된 스트라빈스키의 세 번째 작품 <봄의 제전>.
하지만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때 그들은 <봄의 제전>의 혁신성에 고성과 야유를 퍼부어 댔다.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에 그 초연 장면이 생생하게 나와 있다. 요란한 음악과 괴상망측한 무용수들의 동작이 펼쳐지는 중에 흥분한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고성을 질러대고 거기에 다른 관객이 호응하는 아수라장 같은 장면이.
1막이 끝날 무렵, 경찰까지 동원이 되었다고 하니 가히 그 소동을 짐작할 만하다. 초연 당시 나왔던 불평과 비난은 찬사로 기울어져 파리지앵들은 일 년 뒤 <봄의 제전>에 기립박수로 화답했고 현재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가운데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이자 20세기의 음악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봄의 제전>에서 들려오는 귀를 찢을 듯한 불협화음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낯선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부드러운 은유 속에 갇혀 있던 우리 내면의 원시성, 저 고대의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와 우리의 유전자 속에 억눌려 있을 그런 생명력이 약동하는 것만 같다. 어느덧 희생 제의를 펼쳤던 고대인의 마음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식민지 시대와 지난 80년대까지 봄은 늘 시대에 대한 은유로만 쓰였다. 많은 시(詩) 속에서 현재는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었고, 시인은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우리는 봄을 다시 한번 그런 은유의 세계로 내몰 뻔했다. 그러나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여러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소리가 봄을 구출했다. 광장에서 들려왔던 이 소리야말로 봄이 오는 격렬한 소리들이 아니었을까. 풍요를 기원하며 대지의 신에게 바쳐야 하는 것은 나이 어린 처녀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생각들과 지난 시대의 망령들일지 모른다. 죽은 망령들에서 이제는 산 것을 꽃피워야 할 때.
봄은 어떤 소리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내면의 무엇을 희생해서 삶의 풍요를 기원해야 하는 것일까? 다양한 연주자 다양한 안무가에 의해 각기 다르게 표현된 <봄의 제전>을 보다 보면, 어느새 예술이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바닥 안에 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모니터라면 더 좋겠다. 봄이 오는 격렬한 소리에 잠시라도 넋을 잃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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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소설집 3권과 엔솔로지 2권을 냈다. 여성주의에 관한 논문을 썼다. 중학교 교사로 국어를 가르쳤고 대학에서 소설창작을 가르쳤다. 지금은 전업작가. 문학 외에도 다양한 예술 장르를 좋아하고 즐겨 감상한다. 문학과 예술이 하나가 되는 삶을 꿈꾼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문학과 예술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회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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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 고성 지르고 뛰쳐나갔던 곡, 1년 뒤 기립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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