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권고 외면하는 헌재, 이젠 국가보안법 폐지할 때

[주장] 국제인권규약(ICCPR)을 위반하는 국가보안법 유지

등록 2026.03.14 17:04수정 2026.03.1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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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10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10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OK정연진

대한민국은 1990년 스스로 비준한 국제인권규약(ICCPR)을 위반하면서까지 국가보안법 제7조를 유지하고 있다. 유엔의 30년 권고, 조작 간첩의 눈물, 위축된 북방 경제, 그리고 헌재 내부의 균열. 이 모든 증거는 국가보안법이 더 이상 안보의 방패가 아님을 말한다. 심각한 인권훼손뿐 아니라 국가경쟁력에도 지장을 주고 있는 이 법을 폐지하고 현대화된 안보 체계로 대체할 때다.

대한민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글로벌 리더다. K-컬처가 세계를 매료시키고, 경제력은 10위권을 오르내리며, 독재를 극복한 'K-민주주의'는 개발도상국들의 희망찬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외벽 뒤, 80년 가까이 우리 사회의 사상과 양심을 옥죄어온 거대한 족쇄가 여전히 덜그럭거리고 있다.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유엔 인권기구들의 경고 수위는 전례 없이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 사법부의 최종 보루인 헌법재판소는 '안보'라는 성벽 뒤에 숨어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인권 선진국이라는 자부심과 국제 기준 사이의 이 지독한 괴리, 이제는 그 매듭을 풀어야 할 때다.

지난 수십 년간 유엔 자유권위원회와 인권이사회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일관됐다.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특히 제7조(찬양·고무죄)는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며 국제규약(ICCPR)에 위배된다." 1992년 첫 권고 이후 202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에 끊임없이 '폐지 또는 근본적 개정'을 요구했다.

이 지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핵심 법리가 있다. 유엔의 권고를 '구속력 없는 외부 의견'으로 치부하는 논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대한민국은 1990년 4월,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을 비준했다. 이 순간부터 유엔의 문제 제기는 단순한 권고가 아닌, 조약 당사국으로서의 의무 이행 여부에 대한 확인이 된다.

헌법 제6조 제1항은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다. ICCPR은 대한민국 법질서 내에서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지니며, 이에 반하는 국가보안법 조항의 효력은 헌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특수한 안보 상황'은 조약 의무를 면제하는 사유가 아니다.

더욱이 2023년 헌재의 합헌 결정이 만장일치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소수의견은 헌재 내부에서도 균열이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헌재의 판례는 소수의견의 축적을 통해 변화해왔다. 2025년 유엔 권고는 그 변화를 촉진할 새로운 법리적 근거가 된다.


국제 비교를 해보면 알 수 있다

헌재가 합헌 결정의 근거로 삼는 '남북 대치라는 특수한 안보 상황' 논리는, 국제 비교 앞에서 그 설득력을 잃는다. 비슷한 이념적 대결과 분단, 혹은 독재의 유산을 가졌던 나라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살펴보자.


독일은 동서 대치의 냉전 최전선이었으나, 이적죄 조항을 형법 내에서 엄격히 제한했다. 사상 처벌 조항 폐기했고 실질 안보는 방첩기관 현대화로 대응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보안법을 전면 폐지했다. 진실화해위원회로 과거 청산하고 실질 안보 체계는 오히려 강화했다.

스페인은 프랑코 독재 시절의 보안법을 헌법 민주화와 함께 전면 폐기했다. 바스크 분리주의 등 실제 위협에는 형법으로 대응했다. 대만은 중국의 군사적 위협이 한반도보다 직접적임에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폐지 및 반란죄 조항을 대폭 축소했다. 그러면서도 실질 방어 능력은 유지했다.

이들 모두 '특수한 안보 상황'을 가졌다. 그러나 사상과 표현을 처벌하는 도구를 버리고도 국가 안보를 유지했던 것이다. '특수성'은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아니라, 더 창의적인 안보 해법을 요구하는 맥락일 뿐이다.

법 자체의 구조적 문제

국가보안법을 '보악법'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법이 국가 기구의 조직적 이익을 위해 무고한 시민을 제물로 삼아온 역사 때문이다. 과거 국군보안사령부를 비롯한 공안 기구들에게 간첩 적발은 조직의 예산과 직결된 '의무 실적'이었다.

제7조의 찬양·고무죄는 이 과정에서 가장 편리한 도구였다. 구체적인 이적 행위가 없어도, 소지한 책 한 권, 술자리의 말 한마디가 '실적'이 되었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수많은 '조작된 간첩'들의 사례는 국가보안법이 시민을 사냥하는 데 이용되었음을 법원 스스로가 인정한 결과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이 아니다. 이것은 제7조의 구조적 특성—행위가 아닌 생각과 표현을 처벌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필연적 남용 가능성이다. 조문이 존재하는 한, 그 남용의 잠재성도 함께 존재한다.

반론에 정면으로 답한다

반론 1 : "북한의 실제 대남 공작이 존재한다" → 맞다. 그러나 제7조가 없어도 실질 위협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형법 제98조 간첩죄, 군형법, 사이버안보법, 방첩법 등 기존 법체계는 실제 이적 행위를 처벌하기에 충분하다. 제7조 찬양·고무죄가 처벌하는 것은 '행위'가 아닌 '표현'이다. 북한 체제를 긍정하는 학술 논문, 통일 방안에 대한 토론, 심지어 북한 식당 방문기조차 처벌의 대상이 된 사례가 있었다. 실질 안보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상을 처벌할 필요는 없다.

반론 2 : "요즘은 거의 적용하지 않는다" → 조문이 존재하는 한,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는 실재한다.

실제로 제7조 적용 건수가 줄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법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위협이다. 연구자는 북한 관련 문헌 인용에 자기검열을 가하고, 언론인은 특정 표현을 피하며, 기업인은 북방 사업 검토 시 법무팀으로부터 국보법 리스크를 첫 번째 항목으로 보고받는다. 사용 빈도가 낮다고 독소 조항이 무해해지지 않는다. 권총은 쏘지 않아도 겨눠진 것만으로도 행동을 제약한다.

반론 3 : "탈북민과 안보 피해자들이 오히려 유지를 원한다" → 피해 당사자의 감정적 지지가 법의 헌법 합치성 기준이 될 수 없다.

탈북민 사회 내에서도 국가보안법에 대한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집단이 특정 법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그 법의 헌법적 정당성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헌법적 판단은 다수의 감정이 아닌 법리에 따라야 한다.

북방 경제 발목 잡는 반국익적 법안

한국 경제의 생존 전략은 섬처럼 갇힌 반도를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북방 진출'에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제8조(회합·통신죄)는 이 전략에 지뢰를 심어놓는다. 사업을 위해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북한 관계자를 만나는 행위 자체가 잠재적 범죄가 될 수 있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비롯한 복수의 남북 협력 사업들이 정치적 기류 변화에 따라 법적 리스크로 인해 좌초되거나 위축된 바 있다. 기업 법무팀이 북방 사업 타당성 검토 시 국가보안법 리스크를 최우선 검토 항목으로 올린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현실이다.

일본, 중국, 유럽 경쟁국들에게는 없는 이 족쇄가 한국 기업인에게만 채워져 있다. 남북교류협력법은 북한을 협력의 파트너로 인정하면서, 국가보안법은 같은 북한을 적으로만 규정하는 이중 구조 속에서 대한민국 경제의 창의성은 냉전의 틀 안에 갇혀버렸다.

누가 이 법의 유지를 간절히 원하는가

국가보안법이 국익에 반하고 인권을 침해함에도 왜 사라지지 않는가. 그 이면에는 이 법의 유지를 통해 권력을 재생산하는 특수한 수혜 집단이 있다.

정치적 수혜자: 선거철마다 '안보 프레임'과 '종북 공세'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정치 세력에게 이 법은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다.

조직적 수혜자: 공안 업무를 독점하며 거대한 예산과 인력을 운용하는 정보·수사 기구들은 이 법이 사라지는 순간 조직의 위상을 걱정해야 한다.

이념적 수혜자: 냉전적 사고방식에 기생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극우 단체들에게 이 법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근거다. 일부 극우언론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익과 대한민국의 국익은 다르다.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지켜지는 것이 국가가 아니라 기득권이라면, 그것은 보안이 아닌 보악이다.

폐지는 안보 공백이 아니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안보 공백'에 대한 우려다. 이 우려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결론은 같다. 폐지는 안보 공백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행 법체계:
형법 제98조 간첩죄 + 군형법 + 방첩법 + 사이버안보법 → 실질적 이적 행위 처벌 가능

필요한 보완:
방첩 역량 현대화 + 사이버·심리전 대응 강화 + 국제 협력 안보망 구축

폐지 대상:
제7조 찬양·고무죄 + 제8조 회합·통신죄 → 행위 아닌 생각·표현·접촉을 처벌하는 조항

독일은 냉전 최전선에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체제 전환기에도, 대만은 중국의 군사적 압박 속에서도 이 길을 걸었다. 그들이 버린 것은 안보가 아니라 '안보의 이름을 빌린 사상 검열'이었다. 실질 안보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사법부와 국회, 그리고 민주당에 촉구한다

국가보안법은 더 이상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다. 우리 내부의 불신을 조장하고, 창의적 사고를 검열하며, 경제적 미래를 가로막는 낡은 창살이다. 헌법재판소는 '특수성'이라는 변명을 멈추고, 대한민국이 스스로 비준한 ICCPR 의무의 이행 여부를 정면으로 심사해야 한다. 2025년 유엔 권고는 그 심사의 법리적 촉매다. 소수의견이 축적된 지금, 헌재가 진정한 헌법의 수호자라면 보편적 인권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국회와 민주당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입법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2025년 유엔 권고를 근거로 헌법재판소에 위헌 심판을 새롭게 청구하고, 동시에 형법 체계를 보완한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추진해야 한다.

유엔 인권 기준을 수용하는 것은 외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선진국으로서, 그리고 대륙과 해양을 잇는 경제 허브로서 자격을 갖추는 당당한 자기 선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사상의 자유가 숨 쉬고, 기차가 평양을 지나 런던까지 달리는 '진짜 대한민국'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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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원회 공동위원장, 원전위험공익정보센터 대표이다. 2023년 2월 수원대 교수(도시계획)에서 정년퇴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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