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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임순만의 장편소설 <백범 강산에 눕다>(2026년 3월 출간)는 바로 그 빠진 시간을 되살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김구의 유년기부터 차례대로 출발하지 않는다. 첫 장면은 이봉창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오는 대목이다. 윤봉길 의거도 앞부분에 놓인다. 그런 뒤에야 소설은 김구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이 구성은 단순한 시간 역행이 아니다.
독자는 이미 이봉창과 윤봉길의 끝을 알고 있다. 그 결말을 먼저 본 뒤 어린 김구로 돌아가면, 이 아이가 훗날 어떤 사람들을 품고 어떤 결단을 감당하게 되는지 알고 읽게 된다. 첫 장면에 이봉창을 세운 선택은, 이 작품의 관심이 김구 개인의 업적 정리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664쪽 분량에 24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각 장이 독립된 이야기처럼 읽히면서도 한 사람의 큰 생애로 모인다. 가공의 인물을 내세우지 않고 사료와 기록 위에서 서사를 쌓아 올렸다. 그래서 소설 속 김구는 근엄한 사진 속 위인이 아니라, 흔들리고 견디고 책임지는 인간으로 다가온다. 그 인상을 선명하게 남기는 대목이 있다.
김구는 유치장 마당을 빗자루로 쓸 때나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기도했다. 우리도 언젠가 독립정부를 건설해 제가 우리나라 청사 마당을 쓸고, 창문도 닦는 임을 해보고 죽게 해주십시오.
그 기도는 독립을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소망으로 들리게 만든다. 충칭 임시정부 시절의 궁핍도 같은 결을 이룬다. 청사 임대료와 직원 월급을 마련하느라 정작 자신은 굶주림과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동포 집을 전전하며 끼니를 해결했다. 이 소설에서 김구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이라기보다, 끝까지 자기 몫을 놓지 않은 사람으로 읽힌다.
김구의 본명은 김창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 거북 구를 아홉 구로 바꾸고 호도 백범으로 지었다. 아홉은 끝을 알 수 없는 숫자다. 그 숫자를 이름에 넣은 사람은 꺾이지 않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 백범은 백정의 백과 범부의 범, 가장 낮은 사람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감옥에서 지은 이름이 이 사람의 생애 전체를 예고하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 사형 집행 장면은 그 자체로 놀랍다. 사수는 보병 7사단 소속 하사관 두 명인데 특별한 사격술과 담력, 충성심을 고려해 선발된 인물들이다. 집행 전날 실물 크기의 인형을 무릎 꿇린 채 일곱 번 연습 사격을 거쳤고, 일곱 발 모두 인형 이마 중앙에 명중했다. 연습과 똑같이 명중하면 특별 포상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사수와 수인 사이의 10미터는 우연히 정해진 간격이 아니었다. 사수의 심리적 안정감과 사격의 정확성을 면밀하게 계산한 끝에 마련된, 군사 미학상 권장되는 거리였다. 소설은 이런 숫자와 절차를 역사적 사료에 바탕을 두고 제시함으로써, 한 사람의 죽음마저 훈련과 포상의 대상으로 만든 일제의 잔혹함을 정면으로 고발한다.
<백범 강산에 눕다>는 김구를 업적의 목록으로 세우는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임시정부의 지도자이기 이전에 굶주림과 책임을 함께 견딘 한 인간의 시간이다. 더 나아가 김구 곁을 스쳐 간 이봉창과 윤봉길의 삶까지 함께 끌어안으면서, 독립운동사를 몇 개의 의거나 순국 장면으로 잘라 외워 온 독자의 기억을 흔든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김구는 더 이상 교과서 속 이름으로 남지 않는다.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자기 생애 전체로 감당한 사람으로 다시 남는다. 구를 사건이 아니라 생애로 다시 보게 하는 책이다.
백범 강산에 눕다 - 역사의 격동 속에서 역사의 별이 된 사람들
임순만 (지은이),
한길사,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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