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일자리 사업이 시작됐다. 일자리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안전 교육을 받는 것이다. 현장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미끄러지지 않는 법, 무거운 짐을 드는 자세, 계단을 오를 때 손잡이를 잡는 것, 교육에서 준비한 내용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르신들 앞에 서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분들에게 진짜 위험한 건, 계단이 아닐 수 있다."
무릎이 욱신거려도 매일 나오는 할아버지. 일 년 내내 혼자 밥을 먹는 할머니. 그분들을 가장 위협하는 건 미끄러운 바닥도, 무거운 택배 꾸러미도 아니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하루하루였다. 그날 나는 안전 교육을 하러 갔다가, 안전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우고 돌아왔다.
일 년 내내 혼자였습니다
박 씨 할아버지는 오늘도 지하철 3호선을 탔다. 일흔다섯. 폐지를 줍던 손으로 이제는 택배 꾸러미를 든다. 무릎이 욱신거린다. 그래도 나온다. 집에 있으면 더 아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몸이 아니라, 다른 곳이. 지하철 안, 젊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한다. 할아버지가 "고맙습니다" 하자, 옆자리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노인네들이 공짜로 타니까 적자가 나지."
할아버지는 못 들은 척한다. 익숙한 말이다. 그리고 익숙하다는 건, 상처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상처가 일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날 밤, 같은 동네 이 씨 할머니는 혼자 밥을 먹었다. 어제도 혼자. 그제도 혼자. 일 년 내내 혼자였다. 아들은 경기도 어딘가에 산다. 가끔 카카오톡이 온다. 명절엔 오지 않는다. 바쁘다고 한다. 할머니는 뉴스를 켰다. 한쪽 유튜브를 보면 세상이 이쪽 때문에 망하고, 다른 쪽 유튜브를 보면 세상이 저쪽 때문에 망한다. 어느 쪽을 봐도, 세상은 망하고 있다.
할머니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무서운 건 뉴스가 아니었다. 뉴스를 끈 뒤의 고요함이었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 아무도 묻지 않는 안부. 그 고요함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며칠 뒤, 할머니가 쓰러졌다. 발견한 건 도시락을 들고 온 어르신이었다.
고독사 이전에, 고독생이 있었다
우리는 안전을 너무 좁게 생각해왔다. 넘어지지 않는 것. 다치지 않는 것. 하지만, 이 씨 할머니를 쓰러뜨린 건 계단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고독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전에, 고독생이 있었다. 살아 있는데도 연결이 끊긴 삶. 숨은 쉬지만, 호출되지 않는 삶.
고독생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죽어야만 숫자가 된다. 지난 2025년 11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4년도 고독사 발생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우리나라 고독사 사망자 수는 3,924명이었다. 2020년 3,279명보다 약 19.7%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그 죽음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지워진 삶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세지 않는다. 고독사는 사건이지만, 고독생은 과정이다. 그 과정을 우리 사회는 너무 오래 외면해왔다.
우리가 짐이라는 거잖아요
박 씨 할아버지는 지하철 무임승차 논쟁, 부양 부담 논쟁을 이렇게 알아듣는다. "우리가 짐이라는 거잖아요." 사십 년을 일했고, 세금을 냈고, 자식을 키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뉴스에서, 댓글에서, 그리고 일상 곳곳에서 읽힌다. '빨리 사라져야 할 세대'라는 시선이.
이것이 혐오다. 혐오는 주먹이 아니어도 사람을 무너뜨린다. 말로도. 침묵으로도. 비웃음으로도.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지하철을 탄다. 손에 든 건 택배 꾸러미, 몸에 남은 건 무릎의 욱신거림. 그래도 발이 떨어지는 건, 오늘 받아야 할 택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할아버지가 올 시간을 안다. 현관 앞에서 기다린다. 문을 열고, 손을 내민다. 딱 그것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는, 그것이 꽤 큰 이유다.
노인 일자리는 소득이기 전에 연결이다
나는 오랫동안 노인 일자리 사업 현장에 있었다. 지하철 택배를 하는 어르신들을 곁에서 지켜봤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제 (집 밖으로) 나올 이유가 생겼어요."
돈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분들이 진짜 원하는 건 월급 봉투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누군가 기다리는 곳이 있다는 것. 오늘 내가 여기 있어야 한다는 이유.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하루에 한 명은 있다는 것.
일이 그것을 만들어준다. 노인 일자리는 소득이기 전에 연결이다. 그리고 연결은, 어떤 어르신에게는 생명줄이다.
모든 단절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우리 사회의 불안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노후불안, 노인빈곤, 고독사, 세대갈등, 진영 대결.
하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것들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다. 전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연결이 끊긴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과의 연결이 끊기면, 빈곤이 된다. 사람과의 연결이 끊기면, 고독이 된다. 세대와의 연결이 끊기면, 갈등이 된다. 사실과의 연결이 끊기면,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단절이 한 사람 안에 쌓이면, 어느 날 조용히 쓰러진다. 기다리는 사람 없이. 부르는 사람 없이. 발견되는 시간마저 늦은 채로.
안전은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다
안전 교육 때 나는 결국 이 이야기를 했다.
"오늘 제가 드리려고 했던 안전 교육은 넘어지지 않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나오신 것 자체가, 이미 가장 중요한 안전을 지키고 계신 겁니다."
안전하다는 건 이런 것이다.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잡아주는 손이 있는 것. 혼자가 아닌 것이 아니라, 혼자일 때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있는 것.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두려울 때 옆에 있어줄 사람이 있는 것.
박 씨 할아버지를 오늘 안전하게 만든 건 손잡이가 있는 지하철이 아니었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이 내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 내가 오지 않으면, 한 번쯤 이상하다고 생각해주는 것.
안전은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넘어졌을 때 발견되는 것이다. 무너질 때 붙잡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들어야 할 안전은 '기다리는 한 사람'을 운 좋게 만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한 사람은 있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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