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물 한 잔, 그냥 비입니다"

빗물 한 모금이 정책을 바꾸고, 1000개 레인스쿨로 이어졌다

등록 2026.03.19 10:11수정 2026.03.1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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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 그냥 비입니다."

3월 13일, 캄보디아 왕립학술원(Royal Academy of Cambodia, RAC). 대한민국 대사관 김창룡 대사 일행이 한 컵의 물을 받아 들었다. 잠시 망설임 없이 마신 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맛이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물은 생수도 아니고, 정수된 수돗물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빗물은 설명으로 설득되는 대상이 아니라, 경험으로 이해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캄보디아왕립학술원의 빗물식수화 시설 대한민국 MKCF 자금과 서울대학교 기술로 현지에서 구축된 빗물식수화 시설을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이 방문해 설명을 듣고 시음하고 있다. 이 시설은 국내외 정책결정자와 지식인들이 찾는 주요 방문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캄보디아왕립학술원의 빗물식수화 시설 대한민국 MKCF 자금과 서울대학교 기술로 현지에서 구축된 빗물식수화 시설을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이 방문해 설명을 듣고 시음하고 있다. 이 시설은 국내외 정책결정자와 지식인들이 찾는 주요 방문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한무영

빗물은 설명이 아니라 경험이다

RAC 캠퍼스에 설치된 시스템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10톤짜리 스테인리스 탱크 4대를 직렬로 연결하고, 전기도 쓰지 않고 화학약품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시설은 한-메콩 협력기금(MKCF)의 지원과 서울대학교의 기술을 바탕으로 현지에 구축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분명하다. WHO 음용수 기준을 만족하는 물이 만들어진다. 이 단순한 구조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받아야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많은 비를 맞고도, 그것을 식수로 활용하지 않는가.

RAC는 캄보디아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의 중심이다. 캄보디아는 물론 전 세계의 고위 관료와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방문한다. 이곳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방문자들은 설명을 듣기 전에 먼저 빗물을 한 잔 마신다. 그리고 대부분 같은 반응을 보인다. "생각보다 훨씬 맛있다." 이 경험은 단순한 시음이 아니라 인식을 바꾸는 순간이다. 한 번 마셔 본 사람들은 의심 대신 확신을 가지고 돌아가고, 그 이야기는 문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 퍼져 나간다. 정책은 문서로 확산되지만, 변화는 경험으로 확산된다.

빗물식수화 시설 설명과 수질검사 결과 RAC 직원이 빗물식수화 시설의 구조와 성능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시설이 음용수 수질기준을 만족하는 물을 생산한다는 수질검사 결과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빗물식수화 시설 설명과 수질검사 결과 RAC 직원이 빗물식수화 시설의 구조와 성능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시설이 음용수 수질기준을 만족하는 물을 생산한다는 수질검사 결과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한무영

질문 하나가 정책을 움직였다

사실 이 질문은 그날 처음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1년 전, 캄보디아 관계자들과의 논의 자리에서 일부러 불편한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앙코르와트와 같은 위대한 물관리 문명을 가진 나라에서 왜 지금의 아이들은 빗물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지 물었다.


당시에는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었고, 다른 자리로 옮겨 갔으며, 여러 사람의 생각 속에서 반복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 질문은 하나의 정책 과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교육부는 이 질문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여러 차례 검토와 논의를 거친 끝에, 학교에 빗물식수화 시설을 설치하고 교육과정에 빗물의 가치를 포함시키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1000개 레인스쿨 프로젝트'의 출발이다. 정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의 질문이 그 시작이 될 수는 있다.


이 흐름은 이제 한 나라에 머물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은 UN Rain School Initiative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국제사회와 공유되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서 공감을 얻으며 확산되고 있다. 하나의 질문이 하나의 정책이 되었고, 이제는 하나의 국제적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를 통해 비를 모으고 저장하며 활용하는 거대한 물관리 문명을 만들어낸 나라다. 시골 마을에도 빗물 저장 탱크와 빗물 활용의 전통이 존재해 왔다. 빗물은 기술이 아니라 생활이었고, 문화였다. 단지 그것이 잊혀졌을 뿐이다.

한국이 한 역할은 크지 않다. 약간의 기술을 더했을 뿐이고, 잊혀진 기억과 정서를 다시 끄집어낸 것뿐이다. 빗물은 새로운 자원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 왔던 자원이다. 그 사실을 다시 보게 한 것이 이번 변화의 본질이다.

2022년 베트남 하롱시 NBK 고등학교에서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 임홍재 전 베트남 대사가 빗물을 마신 뒤 "꿀맛입니다"라고 말하며, "이런 작은 것들이 정말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때로는 거대한 인프라보다 작은 변화 하나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K-Rain은 생존의 문화

이제 우리는 새로운 흐름을 이야기할 수 있다. K-POP이 문화를 만들었다면, K-Rain은 생존의 문화를 만든다. 세종대왕의 측우기, 민본정신, 그리고 빗물을 자원으로 바라보는 태도.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하늘을 대하는 방식이며, 물을 대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흐름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현재 유엔에 '세계 비의 날(UN Rain Day)' 제안도 진행되고 있다. 비는 특정 국가의 자원이 아니라 전 인류가 함께 사용하는 공공 자산이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공감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 움직임은 점차 확산되고 있다.

나는 다시 묻고 싶다. 한국은 비가 많이 오는 나라다. 그런데 우리는 빗물을 버리고, 물 부족을 걱정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모습인가.

하늘은 이미 답을 주고 있다. 매년 무료로, 그리고 가장 깨끗한 형태로 물을 내려보내고 있다. 문제는 그 물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기술을 가져간 것이 아니다.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본 기자는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빗물박사(Dr. Rain)’로, 빗물을 단순한 자원이 아닌 문화와 교육의 출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를 비롯한 메콩 지역에서 레인스쿨(Rain School Initiative)을 추진하며, 빗물을 통한 기후위기 대응과 물관리 전환을 실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흐름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세계 비의 날(UN Rain Day)’ 제안을 추진하고 있다. 비는 특정 국가의 자원이 아니라 전 인류가 공유하는 공공 자산이며, 이를 기념하고 배우는 날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여 세계 비의 날을 만들어 간다면, 이는 단순한 기념일 제정을 넘어 우리 사회의 물에 대한 철학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길이라고 믿는다.
#빗물식수화 #캄보디아왕립학술원 #세계비의날 #레인스쿨 #MK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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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빗물박사.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빗물의 중요성을 알리고, 다목적 분산형 빗물관리를 통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할수 있다는 것을 학문적, 실증적으로 국내외에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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