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처럼 넓은, 전설이 된 한탄강 이야기

연천 도감포에서 강 건너 강변따라 걷는 트레일 여행

등록 2026.03.25 14:23수정 2026.03.25 14:2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26.03.12 한탄강 도감포 징검다리
2026.03.12 한탄강 도감포 징검다리 안호용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철 1호선의 종점은 소요산이었다. 그곳을 지나 연천에 가려면 동두천역이나 소요산역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더 오래 전에는 소요산역과 신탄리역을 오가는 낭만의 열차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호선 전철이 한 번에 연천 읍내까지 닿는다. 배차 간격이 거의 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중간에 갈아타지 않는 것만 해도 여행에서 여러모로 많은 득을 볼 수 있다. 물론 지역민의 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도반과 함께 전곡역에서 내렸다. 종착지인 연천역처럼 전곡역도 새 역사가 들어섰다. 단층짜리 기와 역사가 있던 풍경은 이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전쟁 종전 후, 전방 부대에서 온 수많은 군인들의 땀 냄새가 풍기던 역이었다. 이제 그 자리엔 새 역사가 대신하고 있다. 버스는 금세 왔다. 커피 한잔 마실 시간도 없었다. 계획에 있던 시간이니 누구를 탓할 수 없다. 텅 빈 소형버스는 번잡한 전곡 읍내를 벗어나 초봄의 햇살을 뚫고 서쪽 남계리로 달렸다. 도로는 한적했다. 가는 내내 버스에 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도반과 나는 자연그림터꽃나루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한 후 도감포로 내려갔다. 도감포는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임진강은 북한 강원도 마식령산맥의 두류산에서 발원하여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남하한 후 한탄강과 만나 한강의 중요한 지류를 형성한다. 그 임진강에게 이름을 빼앗긴 한탄강은 북한 강원도 평강에서 발원하지만, 대부분의 수계는 남한 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임진강은 북한 지역에 60% 이상의 수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한탄강은 거의 모든 수량을 남한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탄강은 넓은 공간에서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은하수처럼 넓은 강

 2026.03.12 한탄강
2026.03.12 한탄강 안호용

가야 할 트레일은 도감포에서 한탄강을 건너 남쪽 강변을 따라가다 다시 강을 건너 전곡 선사유적지를 거쳐 전곡역으로 가는 코스이다. 도반과 나는 모래, 자갈, 호박만 한 돌들이 혼재해 있는 황량한 둔치를 지나 합류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징검다리로 향했다.

한탄강의 한탄은 원망하고 탄식하다의 '한탄(恨歎)'이 아니고, '은하수와 같이 크고 넓은 여울'이라는 뜻의 '한탄(漢灘)'이라고 한다. 혹은 '물살이 거세서 큰 여울의 강'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철원 지역을 다스리던 궁예의 흔적이 한탄강 주변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의 비참한 말년과 함께 하였다고 하여 중의적인 표현을 가지고 있다는 설도 있다. 협곡과 단애 지역이 많은 한탄강은 오래 전부터 군사적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사실 그런 전략적 활용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궁예가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한탄강은 지질학적으로 볼 때 북한의 강원도 평강 오리산(군사분계선 접경지역)에서 50만 년 전 열하분출 형태로 분출한 용암이 흘러 내려와 생성되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추가령 구조곡 한가운데 위치한 오리산은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대략 50만 년 전에 시작해 15만 년 전까지 왕성하게 화산 활동을 하던 불의 지역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도 살아있는 화산이다.


당시 토해낸 용암이 지대가 낮은 철원과 평강을 덮어 용암대지 즉 지금의 평야를 만들었고, 그에 그치지 않고 더 남쪽으로 흘러 원래 한탄강으로 유입되었다. 물보다 훨씬 많은 대량의 용암은 한탄강 물을 모두 몰아내고 그 공간을 잠식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용암은 점성이 낮아 물처럼 흘렀다고 한다.

그 후 마그마 분출이 완전히 멈추자 많은 비가 내리면서 한탄강의 뜨거운 현무암은 급속하게 냉각되었고, 예전 물길을 따라 다시 거센 물줄기가 만들어지면서 빠르게 침식 현상이 일어났다. 현재의 기괴한 형태의 폭포와 협곡은 당시 형성되었다. 그리니까 현재의 한탄강은 원래 한탄강에 현무암이 덮어 씌워져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탄강 바닥은 용암대지 층이고 주변의 많은 부분도 주상절리와 판상절리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는 가장 약한 층인 주상절리도 침식되어 강폭은 더 넓어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분출된 마그마의 총량이 얼마나 많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뻘건 용암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흐르던 한탄강을 상상해 본다.

 2026.03.12 한탄강
2026.03.12 한탄강 안호용

카오스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1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탈출한 호모 에렉투스 일부가 매우 더디게 동쪽으로 이동하여 약 30만 년 전 일군의 무리가 반도처럼 생긴 전곡 한탄강 변에 잠시 정착하였다. 보다 발전된 아슐리안 주먹 석기로 무장한 그들은 그곳에 초막을 짓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수렵 채집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 이동에 지친 그들에게 한탄강은 잠시 휴식을 취할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깨끗하고 수량이 풍부한 강은 수심이 깊지 않아서 물고기를 잡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조건이 그들의 이동을 잠시 멈추게 했는지 모른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어느 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이 살던 장소에서 여러 가지 석기가 어느 미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실 전곡 선사유적지의 고고학적 연대는 많은 논란이 있다. 세부적으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멀게는 60만 년 설, 중간에 30만 년 ~ 14만 년 설도 있고, 최근에는 4만 년 설도 등장하였다. 아무튼 그럼에도 30만 년 설이 맞다면 석기의 주인은 호모 에렉투스일 것이고, 4만 년 설이 사실이라면 분명 호모사피엔스일 것이다.

한탄강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징검다리가 보였다. 강줄기 중간 중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수심이 낮은 곳이 있는데, 그곳에 화강암으로 만든 직육면체의 돌을 놓아 만든 다리이다. 도반과 나는 그 다리를 건넜다. 중간에 거센 물살로 돌이 기울어진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위험하지는 않았다.

한탄강은 종잡을 수 없는 악동 같기도 하다. 장마철이나 한바탕 폭우가 쏟아질 경우엔 수량이 급격하게 불어나 거센 노도를 이루며 협곡을 집어삼킨다. 강바닥이 현무암층이라 지하 물길을 막기 때문이다.

많은 수량이 북에서 발원한 임진강에 비하면 작지만 한탄강도 임진강의 영향을 받아 괴물로 변하기 십상이다. 평소엔 행랑객들이 찾아오고 특히 강가 모래톱에서 야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이런 평화로운 풍경은 한순간 지옥으로 변할 수 있다.

더구나 예나 지금이나 도감포 부근은 주요 군사 지역이다. 그 말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은 모르지만, 예전에는 한탄강과 임진강 부근에서 훈련이나 작업하는 군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날 것의 숲길을 걸으며

 2026.03.12 한탄강
2026.03.12 한탄강 안호용

돌다리를 건너자 강변 숲길이 길게 이어졌다. 야자매트만 깔려 있을 뿐 날 것의 숲 길이었다. 중간에 1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이름 모를 나무가 숲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녹음이 지면 보다 짙은 숲이 이 공간을 지배할 것이다. 조금 더 가자 데크 길이 나타났다. 그 테크는 강변을 따라 1.5킬로미터 이어졌다.

도반과 나는 한탄강 물줄기가 굽어 보이는 데크길 벤치에서 간단하게 싸 온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먼 여정에 나섰다. 도감포 길은 한탄강변을 따라 5킬로미터 더 이어져 전곡 선사유적지에 다다른다. 한탄강 주상절리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여유롭고 호흡이 긴 데크 숲길이 끝나고 이제 태양에 노출된 강변길이 한 시간 정도 더 이어진다. 중간 지점에서 강 건너편으로 한탄강의 지류인 차탄천과 고구려 시절 구축했다고 하는 은대리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탄강변에는 행랑객들이 다녀간 흔적이 역력했다. 완연한 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지금도 한탄강 상류로 올라가면서 많은 잔도와 테크와 철제 아치교들이 풍광 좋은 협곡 곳곳에 주렁주렁 걸려 있다. 현무암에 박혀 있는 화려한 그 설치물들은 행락객을 유혹하고, 여전히 한탄강은 말없이 그 아래에서 흐른다. 누구에겐 전설이 된 그 강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한탄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버이날 딸이 건넨 '5천만원', 10년째 고이 모셔두고 있습니다 어버이날 딸이 건넨 '5천만원', 10년째 고이 모셔두고 있습니다
  2. 2 백제 시대 변기 보고 '빵' 터진 이유, 보시면 압니다 백제 시대 변기 보고 '빵' 터진 이유, 보시면 압니다
  3. 3 "이런 사람 처음 본다" 재판장도 경악한 임성근 태도, 징역 3년 부메랑 "이런 사람 처음 본다" 재판장도 경악한 임성근 태도, 징역 3년 부메랑
  4. 4 개헌안 상정 포기 우 의장 조롱한 국힘..."외교결례, 사과하라" 개헌안 상정 포기 우 의장 조롱한 국힘..."외교결례, 사과하라"
  5. 5 젊은 층 대거 유입된 신도시에 우뚝 솟은 인물 젊은 층 대거 유입된 신도시에 우뚝 솟은 인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