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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철모르던 부잣집 손녀딸의 삶을 어떻게 바꿨나

오도롱 떠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1937년생 김현숙 삼춘의 이야기

등록 2026.03.26 14:09수정 2026.03.2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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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떠나버릴까 매일 불안에 시달려

"내가 공부를 했으면 진짜 제주도 다 들러 먹어실꺼여. 나는 열두 살 때부터 내 욕심은 생각하지 말앙 그냥 살아야 했어. 어떵 살아나갈 건가 그 생각만 했어. 어머니가 혹시 동생들 놔두고 어디로 가불믄 동생들은 어떵 돌봐야 하나. 매일 그 상상하면서 무서운 꿈을 꾼 거라. 나 공부보다 우리 가족이 멸족되다시피 해버리니까 친정 오래비들 잘되게 하는 게 더 먼저라났어."

어머니의 외사촌인 현숙 삼춘은 4.3 당시 가족들과 함께 오도롱을 떠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제주 읍내에 살았다. 2년 전 현숙 삼춘을 처음 찾아뵈었을 때 삼춘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허리가 꼿꼿했고 직접 운전을 하며 다닐 정도로 건강했다. 작년에 했던 허리 수술 휴유증으로 거의 바깥 출입을 못하신다는 이야기에 걱정이 컸지만 최근 다시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뵈었을 때는 생각보다 건강한 모습이었다.

2년 전 딸과의 해외 여행에서 찍은 사진 삼춘은 민낯으로 사진을 찍기 싫다며 2년 전 여행 사진을 실어달라고 하셨다.
▲2년 전 딸과의 해외 여행에서 찍은 사진 삼춘은 민낯으로 사진을 찍기 싫다며 2년 전 여행 사진을 실어달라고 하셨다. 김현숙

4.3 당시 할머니와 아버지, 아버지 형제들을 모두 잃은 삼춘은 집안을 다시 살리는 것이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소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소명 너머에는 어머니가 동생들과 자신을 두고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역시 깊게 도사리고 있었다.

"오도롱 떠나서 목관아지 길 건너 서쪽 편에 있던 삼청골에 사는 이모네 집 방 한 칸에 우리 식구들이 살았어. 그 집 안거리 2층에 도남동 살당 피난 내려온 가족이 살아났어. 거기도 아버지 죽고 오남매라났어. 우리랑 형편이 비슷한 집이었는데 어느 날 어멍이 아이들 다섯을 여기 저기 남의 집에 맡기고 재혼한 거라. 바로 옆에 살았던 집에서 경허니까 나는 '우리 어머니도 저렇게 우리들 놔뒁 어디로 가불면 이 동생들은 내가 어떵 돌봐야 하나' 덜컥 겁이 나는 거라. 내가 큰 딸이었으니까. 그때부터 그 생각을 계속 하게 됐어."

화양연화: 오도롱 부잣집 손녀딸 시절

현숙은 오도롱의 호병밭에서 태어났다. 오도롱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호병밭은 18가구에 86명 정도가 사는 작은 부락이었다.

"할아버지는 가진 땅도 좀 있고 한약방 하면서 돈도 좀 벌고 부자였어. 우리 집 서쪽 동쪽 사는 사람들이 다 우리 집에서 일했지. 훈장도 했었고 제주 서쪽에서 하귀, 애월 안쪽으로는 인품하고 지식에서 우리 할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다고들 말했지."

현숙의 할아버지는 1926년 마을에 세워진 개량서당 소화의숙의 숙장을 맡았고 할머니는 노형에서 역시 숙장을 하던 이의 맏딸이었다. 당시 오도롱 사람들은 마을 아래쪽 바닷가마을인 도두 백개 지역보다 윗마을인 노형 마을과 혼인을 많이 했다. 할머니의 여동생 둘 모두 오도롱 사람과 결혼했다.

"오도롱 사람들은 선비같이 얌전한 편이었지. 바닷가 쪽 도두 백개 지역하고는 개촌이라고 사돈을 잘 안 맺었지. 노형 사람은 양반으로 생각해서 오도롱 사람이 노형 양씨 집에 시집가고 노형 양씨 집에서 오도롱 김씨 집에 시집오고 그 때는 그랬어. 그래서 우리 할머니들도 셋 다 노형에서 오도롱으로 시집왔던 거지."

부잣집 첫째 손주로 태어난 현숙은 집에서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자랐다. 외가로도 첫 손주여서 양쪽 집안에서 아낌 없는 사랑을 받았다. 4.3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절이 현숙의 인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행복했던 화양연화였다.


외가 역시 오라리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외삼촌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현숙에게는 다정했다. 외갓집에 놀러온 현숙에게 공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이 짚신을 신고 다니는 동안 현숙은 드물게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운동화를 신고 공을 가진 현숙은 몇 가구 안 되는 호병밭에서 별난 존재였지만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아이들은 현숙의 운동화가 마냥 신기해서 자기 고무신과 바꿔 신어보자고 조르면 현숙은 운동화를 내주고 그들의 고무신을 신었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았기에 기세당당하면서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남 부러울 것 없던 그 시절에 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948년 11월 오도롱을 떠나다

4월 3일 제주도 오름 곳곳에 봉화불이 타올랐다. 처음부터 토벌대가 민간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5월 10일 치러진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의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미달로 유일하게 무산되었고 제주도는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혔다.

10월에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자 군은 제주도의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역과 산악지대에 허가 없이 통행할 경우 폭도로 인정해 총살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1월의 어느 날 저녁, 오도롱 서편의 광령 마을이 불탔다. 고층건물과 불빛이 없던 시절, 광령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고 하늘이 온통 연기로 뒤덮이는 장면이 이웃 마을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히 호병밭은 광령과 가까웠기에 불타는 장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나와 남쪽 하늘을 감싸는 연기와 붉은 불빛을 보며 주변에 떠도는 말들을 나눴다.

"아이고, 저기서는 누가 살려달라고 하면 그냥 불에 그슬려서 죽여버린다고 하던데."

그 때 현숙은 어머니가 혼자말로 간절하게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고 곧 죽더라도 읍내에 가서 오라버니랑 식구들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새파랗게 질려 있는 동네 삼촌들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고 잔뜩 얼어붙어 있던 현숙은 어머니의 혼잣말에 마을을 벗어나면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빨리 읍내에 가게 마씸, 더 여기 있지 말고 서둘러 읍내에 가게 마씸."

현숙이 어머니 치맛자락에 매달리자 곁에 있던 남동생도 덩달아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부엍 솥에는 덕지답에서 수확한 쌀로 막 지은 밥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고 닭을 삶은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오고 있었다. 하얀 쌀밥과 닭은 자주 상에 올릴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우리가 하도 조르니까 어머니가 밥 먹고 읍내에 가자 하는 거야. 아까우니까 그거 자식들한테 먹이고 출발하려고 한 거지. 그때 무슨 마음인지 나하고 동생이 그걸 안 먹고 어머니한테 빨리 가자고 막 등을 떠민 거라. 어린 마음에도 여기 그냥 남아 있으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났던 거 같아. 우리가 막 그렇게 하니까 어머니가 쌀하고 먹을 것들 싸서 등에 지고 나는 옷들 조금 등에 지고 남동생이 막내 동생 등에 업고 그렇게 시내로 막 걸어갔어."

현숙과 가족들은 한 시간 넘게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걸어서 서문파출소에 도착했다. 읍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파출소에 양민증을 보여주어야만 했지만 5.10선거를 거부했던 오도롱 사람들에게는 양민증이 없었다. 현숙의 어머니는 할 수 없이 현숙과 남동생 둘만 들여보낸 후 막내를 업고 오도롱 마을로 돌아갔다.

1948년 11월 오도롱을 떠나 현숙 삼춘 가족들이 머물렀던 삼청골 2층집. 여전히 당시 외형이 남아 있는 건물은 현재 국밥집으로 리모델링되었다.
▲1948년 11월 오도롱을 떠나 현숙 삼춘 가족들이 머물렀던 삼청골 2층집. 여전히 당시 외형이 남아 있는 건물은 현재 국밥집으로 리모델링되었다. 김순애

다음 날 집에 온 아버지가 사정을 듣고 나서 어머니에게 '죽어도 같이 살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당장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라'고 다그쳤다. 결국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막내를 업고 읍내로 향했다. 당시 민보단 단장이었던 외삼촌이 어머니가 읍내로 들어갈 수 있게 손을 썼다.

"어머니가 우리를 데리고 다시 오도롱으로 가려고 했는데 외삼촌이 말렸어. 외삼촌이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아야 한다'고 절대 오도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어. 외삼촌은 민보단장이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 것을 알았던 거지. 오도롱으로 가면 우리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도 안 거고. 그렇게 해서 우린 시내에 그냥 살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오도롱에 가보지 못했어."

그렇게 현숙은 아버지와 헤어졌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호병밭 사건

계엄령이 내려지고 12월 7일 오도롱의 첫 집단학살인 호병밭 사건이 일어났다. 토벌대는 그 전에 오도롱 윗동네인 노형리를 불태웠다. 노형에서 오도롱으로 시집왔던 이들 가운데 몇몇이 이날 노형 친정집으로 갔다가 변을 당하기도 했다. 마을을 깡그리 불태운 토벌대는 살아남은 이들을 강제로 아랫마을로 내려가게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사돈이 사는 오도롱으로 내려왔다.

무장대는 군인과 경찰의 통신망을 끊기 위해 백개 일주도로의 전주를 잘라버렸고 도두지서는 전주 복구 작업을 해야 한다며 12월 7일 오도롱 주민들과 노형, 광평에서 소개되어 내려온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동네 젊은이들은 여름부터 대부분 산으로 올라가 버렸거나 낮에는 피신해 있다가 밤에만 잠깐 집에 머물렀기 때문에 동원된 이들은 대부분 장년층이었다.

경찰과 특공대는 그들에게 전봇대를 다시 세우게 한 후 호병밭에 집결시켰다. 30여 명 가까운 이들이 호병밭에 모였다. 경찰은 호병밭에 모인 주민들에게 모두 눈을 감으라 명령한 후 특공대에게 무장대와 내통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지목하게 했다.

그날 현숙의 어머니는 집에 있는 곡식을 챙겨오려고 오도롱 호병밭으로 왔다. 억새가 많은 연못이 있어서 억새미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아주 좁은 길을 통과해서 집에 도착했다. 고팡에 있는 곡식들을 챙기고 있을 때 새파랗게 질린 표정의 이웃들이 몰려와서 경찰과 특공대가 마을 쪽으로 오고 있다고 말했다. 현숙의 할머니는 며느리를 서둘러 고팡 뒷방에 숨겼다.

"호병밭에 끌고 간 사람 중에 우리 알력집에 사는 영배네라고 있었어. 그 집 아방이 좀 입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 경찰들이 총 들고 뭐라고 하니까 일어나서 막 따지고 들었어. 그러니까 그 삼춘이 제일 먼저 총살당했지. 그리고 차례대로 거기 있는 사람들을 총살했다고 들었어. 다행히 우리 어머니는 고팡에 숨어서 화를 면했는데 어머니가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소식이 없으니까 우린 어머니가 죽은 줄 알았지. 이모하고 외할머니가 나하고 동생들한테 '아이고 너네 형제 놔두고 너희 어멍 죽었다, 이제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니' 하면서 막 울고 했어."

그날 죄 없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곳은 현숙이 동네 아이들과 함께 뛰놀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호병밭 안에 있는 무덤이 우리 놀이터였어. 동갑나기 동네 남자아이들하고 같이 놀았는데 그 때 여자 아이들이 없으니까 거의 맨날 남자 아이들하고 놀았지. 한 아이가 별명이 '배 아픈 하루방'이었는데 설사하면 배 아프다고 자꾸 집에 가버리고 하니까 우리가 별명을 그렇게 붙였어. 그 밭에서 하룻밤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기막힌 노릇이었지."

경찰들은 호병밭에서 사람들을 죽인 후 호병밭, 웃동네, 알동네, 섯동네가 있는 가물개를 전부 불태웠다. 사람들은 이 때 일을 이야기할 때 '호병밭 사건' 또는 '전봇대 절단 사건'이라고 불렀다.
호병밭 사건은 오도롱의 대량학살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젊은 사람이 안보이면 남아있는 이들에게 '남편과 아들이 어디 갔느냐'고 따지며 사람들의 목숨을 함부로 앗아갔다.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마구잡이 총살극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제주도 전역이 불바다가 되었고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주투데이에도 실립니다. 필자는 제주녹색당 운영위원장입니다.
#43 #김현숙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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