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3.30 10:52수정 2026.03.3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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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도심 한복판, 콘크리트 빌딩 숲 아래 유유히 흐르는 양재천의 봄 풍경. 번잡한 도시와 대비되는 자연의 여백이 평온하다.
전갑남
양재천의 봄은 걸어야 비로소 만끽할 수 있다. 차창 너머로 휙 지나치는 풍경에는 계절의 온기가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내 발바닥이 지면에 닿아 온몸으로 전해질 때, 그제야 봄은 내 안으로 스며든다.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경은 환한 얼굴을 바꾸고, 그 미세한 변화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며 비로소 계절의 실체가 손에 잡힌다.
지난 토요일(28일) 오전,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양재천 산책로에는 이미 찾아온 봄을 맞이하려는 이들로 활기가 넘친다.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는 이들, 가벼운 옷차림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리듬감 있게 조깅을 하며 이마에 땀방울을 맺히는 젊은이들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움직이지만, 모두가 '봄'이라는 같은 강물 위에 떠 있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처지지만, 그 역동적인 몸짓 사이로 봄의 기운은 소리 없이 번져나간다.

▲ 성급하게 터진 노란 개나리가 성큼 다가온 봄을 알린다. 그 아래로 벚나무 터널 아래 산책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전갑남
낮은 곳에서 만난 시(詩) 한 구절
하천 변에는 지난 겨울의 흔적을 간직한 억새가 허리를 굽혀 흔들린다. 그 곁으로 매끄럽게 뻗은 자전거길은 봄볕을 받아 길게 빛을 그으며 이어진다. 언덕 위로 눈을 돌리면 노란 개나리가 성급하게 꽃망울을 터뜨려 봄의 도착을 알리고 있다.
산책로에는 수십 년 세월을 견뎌온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터널을 이뤄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다. 아직은 꽃봉오리를 꽉 다물고 있지만, 막 터지기 직전의 팽팽한 설렘이 더 크게 다가온다. 화려하게 만개한 순간보다,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 시간이 어쩌면 계절의 가장 근사한 표정인지도 모른다.

▲ 발밑에 소담하게 무리 지어 피어난 봄까치꽃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우리 살아 있어 행복하지!"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전갑남
벚나무의 웅장함에 시선을 뺏기다 잠시 언덕 아래 발밑을 내려다본다. 낮은 곳에 보라색 작은 꽃들이 소담하게 무리 지어 피어 있다. '봄까치꽃'이다. 이름 만큼 정겨운 이 작은 생명들은 서로 얼굴을 내밀 듯 고개를 맞대고, 어느새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화려한 꽃들에 가려지기 쉽지만,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그 소박한 강인함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발밑에 핀 이 작은 꽃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몇 년 전 써 놓은 내 시 <봄까치꽃>이 떠올랐다.
<봄까치꽃>
따스한 해가 드는 아침
보랏빛 작은 꽃들이 입 모아 인사합니다.
얼굴 가득 수줍어 보입니다.
새봄 먼저 꽃 피우려고
설레는 가슴 누르며 언 땅에서 얼마를 기다렸을까요?
따사로운 봄바람에 부끄러움 벗어던지고
화사한 웃음보 터뜨립니다.
꽃 한 송이 버티는 건 하루뿐
형님 꽃 지면 다음 날 아우 꽃 피고...
꽃들이 서로 말합니다.
"우리 살아 있어 행복하지!"

▲ 발밑에 소담하게 무리 지어 피어난 봄까치꽃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우리 살아 있어 행복하지!"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전갑남
그때 썼던 시구처럼, 하루를 버티고 지는 형님 꽃의 뒤를 이어 아우 꽃이 피어나는 경이로운 이어달리기가 이곳 양재천 언덕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크고 눈부신 것들 사이에서, 이토록 작고 낮은 것들이 오히려 계절의 깊이를 묵묵히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살아 있어 행복하지"라는 꽃들의 속삭임이 내 낡은 수첩에서 걸어 나와 지금 내 발밑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다리 밑에 머무는 시간의 미학

▲ 영동2교 아래 다리 밑 그늘. 어르신들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유독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의 미학이 머무는 공간이다.
전갑남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줄지어 선 장관을 만난다. 그 아래로 드리운 짙은 그늘은 걷느라 달궈진 몸의 열기를 잠시 식혀준다.
영동2교 아래에 이르면 공기는 한결 서늘하고 맑아진다. 다리 밑 그늘은 동네 어르신들의 정겨운 사랑방이다. 벤치에 모여 앉아 나누는 이야기 속에는 어제의 뉴스도 있고, 자식 걱정과 지난 세월의 회한도 섞여 흐른다. 웃음소리와 탄식이 교차하는 그곳의 시간은 유독 느릿하게 흐른다.

▲ 양재천 산책로는 이미 봄을 맞이하려는 이들의 활기찬 발걸음으로 가득하다. 굳게 다문 벚나무 가지가 '팽팽한 설렘'을 품은 채 산책로를 감싸고 있다.
전갑남
억새를 베어낸 빈 터에서 비둘기들이 분주히 먹이를 찾고, 물속에는 팔뚝만 한 잉어들이 유유자적 헤엄을 친다. 다리 위 도로에서는 자동차들이 바삐 세상을 지나가고, 다리 아래에서는 생명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머문다. 이 기묘한 대비는 양재천의 평온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번잡한 도심 속에서 찾아낸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는 가장 큰 위로다.
거대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이런 풍경을 마주한다는 것은 일상의 축복이다. 숨 가쁘게만 흘러갈 것 같던 도시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사람들은 그 계절을 저마다의 마음으로 환대한다. 봄은 단지 기온이 오르고 꽃이 피는 때만은 아니다. 꽁꽁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비로소 느슨하게 풀리는 치유의 시간이다.

▲ 언덕 위 산책로에서 내려다본 양재천의 봄 풍경. 지난겨울의 흔적을 간직한 채 마른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너머로 봄볕을 받은 자전거길이 매끄럽게 뻗어 있다.
전갑남
양재천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그 여유로운 기운이 내 안으로 옮겨온다. 굳어 있던 고정관념이 말랑해지고, 바쁘게만 돌아가던 마음의 시계 태엽이 한 박자 늦춰진다. 이제 머지않아, 저 벚나무들이 일제히 연분홍 꽃등을 밝히면 양재천의 봄은 절정의 완성을 이룰 것이다.
그 눈부신 순간은 아마도 며칠 가지 못할 터다. 하얀 벚꽃이 만개해 눈부신 꽃 대궐을 이루고, 마침내 바람에 못 이겨 꽃잎이 소나기처럼 흩날리는 날! 이 봄은 우리 생의 한 페이지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봄은 그렇게, 화려한 마침표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며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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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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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으로 물든 양재천 언덕, 발밑을 유심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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