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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6.04.01 15:24수정 2026.04.02 15:4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해 심장수술을 마친 후로부터 무기력한 날이 지속돼 왔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매일 빠지지 않고 약만 먹으면 좋아질 것이라는 주치의의 진단에도, 정신적인 상태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똑 같이 반복되는 생활은 슬럼프로 가는 요인이었다. 이래서 안 되겠다는 생각에 탈출구가 필요했고, 그래서 시작한 게 걷기운동이었다. 그렇게 4개월 동안 하루 10km 이상을 거르지 않고 걷고 있다.

▲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을 걷고 있는 일행.
정도길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페이스북 글 하나가 관심을 끌었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사단법인 숲길이 주관하는 '토요걷기' 행사로, 1회 신청 인원은 20명 한정으로 선착순으로 접수, 매주 토요일 집결지에 모여 하루 1구간 둘레길을 걷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리산둘레길은 3개도(경남, 전남, 전북), 5개 시군(하동, 산청, 함양, 남원, 구례), 20개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21개 구간 289.4km(숲길 공식자료)의 거리다.
지난 3월 14일, 처음으로 지리산둘레길 5코스 동강~수철 구간 걷기에 참여했다. 동강마을(함양군 휴천면)에 모여 수철마을(산청군 금서면)로 이동, 수철마을에서 역순으로 동강마을로 걸었다. 이 구간은 12.1km로 주요 경유지는 수철마을, 고동재, 산불감시초소, 쌍재, 상사폭포,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자혜교 그리고 동강마을로 이어진다.

▲준비운동 지리산둘레길을 걷기 전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정도길
간단한 인사와 준비운동을 마치고 걸음은 시작됐다. 출발지인 마을부터 오르막 구간이다. 십여 분 걸으니 숨이 차올라 겨울용 등산재킷을 벗어야만 했다. 1시간 좀 넘게 걸어 고동재(해발 559m)에 도착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고동재는 주변 산줄기가 고동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과 계곡 풍경이 아름다운 트레킹 명소로 알려져 있다.

▲고동재 수철마을에서 1시간을 걸어 고동재에 도착했다.
정도길
숲속 길은 낙엽이 쌓여 푹신해서 걷기에 편하다. 짧은 내리막길과 긴 오르막길이 연속적으로 반복된다. 숨이 가쁘고 힘들다 보니 내리막길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 시작인데 생각하면 앞만 보고 걸을 수밖에 없다. 인생사도 평탄한 길만 걸을 수는 없는 것이고 보면, 자연은 인간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것만 같다.
3개도 5개 시군 120여 개 마을 잇는 순례길

▲지리산 뒤쪽 능선 맨 왼쪽이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다.
정도길
두 시간을 걸어 최고 고도인 산불감시초소(해발 680m)에 도착했다. 지리산둘레길은 구간마다 고도가 250~800m를 오가는 길로 이루어져 있다. 초소 사방으로 뻥 뚫린 시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면으로는 함양군 일대가, 반대쪽은 산청군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을 많이 다녔어도 천왕봉이 이렇게 가까이 느껴지는 장소도 이곳 외에는 별로 없지 않을까 싶다. 간단한 도시락으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리막길은 역시 편하다. 구간 중간마다 벅수(마을 어귀나 길가에 나무나 돌로 세운 사람 모양의 형상)가 길을 안내한다. 벅수에는 고유번호와 함께 지나온 거리와 남은 거리가 표기돼 있어, 길 안내와 함께 체력 안배에 참고가 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 화살표 중 빨간색은 정방향이고, 검은색은 역방향으로, 오늘 일정은 역방향 순으로 걷고 있다.

▲벅수 벅수에는 남은 거리와 지나온 거리가 표기돼 있다.
정도길
지리산둘레길은 산 정상을 목표로 걷는 길이 아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며, 마을의 역사를 알고 문화를 체험하는 길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아주 오래된 숲길이 선조들의 흔적이 담긴 길이라면, 최근에 닦인 길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낸 길로서, 그 길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냇물 흐르는 소리가 청아하다. 작은 계곡에서 얼었던 물이 녹아 새 생명에 기운을 넣어주기 위해 내는 소리로 들린다. 엎드려 입을 갖다 대고 한 모금 들이켜니 온몸이 짜릿하다. 어릴 적, 소를 몰고 다닐 때, 배가 고파 계곡물을 한없이 마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거의 60년 전의 일로 인생무상이 느껴지는 지금이지만, 물맛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가 않다.

▲봄 계곡에서 흐르는 물 한 잔을 마시니 온 몸이 짜릿하다.
정도길
상사폭포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상사폭포는 산청군 방곡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약 20m 높이다. 여름철 수량이 많을 때는 옆에 자리한 50m 높이의 상사바위와 함께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폭포 주변은 벼랑길로 오래 전 이 폭포를 지나쳐 오르다가 두 명의 인명사고 났다는 게 안내자의 설명이다. 이후 울타리를 세우는 등 안전대책으로 지금은 안심하고 걸을 수 있도록 조치해 놓았다.

▲상사폭포 방곡마을에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20여 미터의 폭포다.
정도길
뼈아픈 전쟁의 현장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울창한 숲속에서 사방이 탁 트인 곳으로 나오니, 뻥 뚫린 시야에 눈이 부시다. 앞으로 펼쳐진 저수지는 안정적인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방곡댐으로, 2023년부터 저수가 시작돼 지금은 만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출발지인 수철마을에서 약 4시간 만에 방곡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에는 한국전쟁 당시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때는 1951년 2월 7일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국군 11사단 8연대 3대대가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작전명령 제207호) 중, 양민을 통비분자로 간주하여 집단학살을 벌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산청과 함양 2개군, 3개면 4개 마을에서 1,818명의 인명피해를 발생시켰고, 사망자는 386명(산청 251명, 함양 135명)으로 기록돼 있다.(산청군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홈페이지 자료)

▲산청함양사건역사교육관 산청함양사건역사교육관 제1전시실.
정도길
시간을 내어 산청함양사건역사교육관에 들러 한국전쟁 당시로 돌아 가 보았다. 제1전시실의 주제는 '모두가 기억해야 할 비극'의 공간으로 주인공 강이의 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엄마와 아들 강이는 무표정하게 대청마루에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다. 1950년대 말 태어난 꼭 나를 닮은 모습이다. 당시 아들은 집안의 대를 잇는 보물로 여겨졌고, 딸보다 대우받던 시절이었다.
강이는 엄마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까.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고, 때로는 공비가 출몰해 끼니마저 훔쳐 가는 일도 빈번했다. 하루 종일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모자의 걱정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1950년대 모습으로 재현해 놓은 마을은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75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의 아픔은 온전히 치유되었을까.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서 소중한 역사 공부를 한 시간이었다.

▲강이와 엄마 산청함양사건역사교육관에 있는 당시 주인공인 강이와 엄마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정도길
지리산둘레길 21개 코스 완주로 자신감 찾고 싶어
이 공원 입구에는 지리산둘레길 동강~수철 구간 스탬프함이 있는 위치다. 지리산둘레길 21개 구간을 걷고 싶은 여행자라면, (사)숲길이 발행한 지리산둘레길 전체구간 여행자 안내서인 스탬프북을 구매하여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는 이용수칙과 주의사항, 구간별 전체지도와 소개, 이정표, 안내센터 연락처, 스탬프찍는 위치 그리고 완주기록 등을 남길 수 있는 책자로서, (사)숲길 홈페이지나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 있다.

▲스탬프포켓북 지리산둘레길 안내 책자 스탬프포켓북.
(사)숲길
아픈 기억을 안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빠져나와 넓은 도로를 따라 목적지인 동강마을로 향한다. 기지개를 켜는 봄은 농부를 집안에 쉬게 하지 않고 들로 불러내어 일을 시킨다. 소 대신 통통거리며 소음을 내는 트랙터는 밭갈이에 열심이다.
2026년도 처음으로 시작한 지리산둘레길 5코스 동강~수철 구간 12.1km 토요걷기는 총 5시간 30분이 걸렸다. 이날은 신청인원보다 많은 인원이 참가하다 보니, 신청인원외 참여를 자제해 달라는 관리자의 당부사항으로 일정은 끝이 났다. 이대로라면 올 하반기쯤이나 될까, 지리산둘레길 21개 코스를 완주하는 그날이 기다려진다.
• 지리산둘레길 5코스(동강~수철) 12.1km 5시간, 동강~수철 난이도 중/수철~동강 난이도 중
동강마을 – 자혜교(1.2km) – 산청함양 추모공원(1.5km) – 상사폭포(1.8km) – 쌍재 (1.7km) – 산불감시초소(0.9km) – 고동재 (1.4km) – 수철마을(3.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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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지 않던 마음, 지리산 둘레길에서 찾은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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