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방제림
김재근
위쪽 좌안으로 관어정을 지나 죽녹원 대나무 숲이 펼쳐졌다. 관어정 일대의 풍경은 천상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우안으로 강둑을 따라 팽나무와 푸조나무가 길게 늘어섰다. 강폭이 넓고 물줄기 커서 자주 범람하여 홍수 피해가 컸다 한다. 그래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이다.
오 리에 걸쳐 수백 년 된 고목들이 호위하는 이 길이, 담양의 상징이 되었다. 거대한 풍치림 아래로 국수 거리가 형성되었다. 죽녹원의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봄기운을 일찍 즐기려는 상춘객으로 붐볐다.
다리 아래쪽으로 오일시장이 열린다. 2일과 7일이 장날이다. 다른 시장도 있다. 다리와 장터 사이에 테라스가 인상적인 하얀 건물, 담양상설시장이다. 지하는 주차장, 1층은 시장, 2층은 식당가, 3층은 카페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베트남 음식점이다. 쌀국수와 반미 바게트를 주문했다.
휴일을 맞아 고향 음식을 먹으러 왔을까. 낯선 언어가 넘쳤다. 베트남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이 낯선 모습이 실은 우리의 일상이고 우리 이웃이 된 지도 오래인데, 언제까지 다문화라는 말로 그들과 경계 지어야 할지.
경험이 짧아 베트남 음식을 평가할 수준은 못 된다. 한국에 온 관광객이 몇 번 먹어 본 김치찌개 같달까.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없이 사는 사람은 양으로, 조금 있게 산다고 하는 사람은 맛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분위기로 평가한다던가. 아주 좋은 분위기였다. 여행 속의 또 다른 여행 같은 느낌이 좋았다. 훌륭한 점심이었다.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 제월당 모습이다.
김재근
오늘 여정의 종착지, 정자 문화와 가사 문학의 산실로 향했다. 무등산 아래, 광주호 상류 창계천변에 소쇄원과 환벽당과 식영정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가사문학관이 있다.
가사문학관은 건물의 위용을 전시물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이어 찾은 소쇄원(瀟灑園). 한국 민간 원림의 원형이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스승을 잃은 슬픔을 달래며 조성했다.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가꿔 오늘에 이르렀다.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도가적 생을 살아간 조선 선비들의 삶이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다.
입구인 대나무 숲을 지나니 매화와 수유가 활짝 피어 있다. 북쪽 산 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고 담장 밑을 통과해 원림의 중심을 관통한다. 너럭바위, 외나무다리, 연못 등이 인공미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는 듯한 정취로 가득하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도 제자리를 지키며 조화를 이룬다. 담장 밑을 흐르는 계곡물과 광풍각, 제월당이 이루는 풍경은 오백 년 세월을 건너온 선비의 심상을 고스란히 전하는 듯했다.

▲환벽당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낙향해 짓고 후학을 길렀다.
김재근
환벽당(環壁堂)은 하천 건너 광주광역시 영역. 창계천 변 언덕 위에 있다. 푸른 기운이 고리를 두르듯 에워싸고 있다는 그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1501~1572)가 낙향해 짓고 후학을 길렀다. 대표적인 제자가 송강 정철이다. 16세부터 27세에 관직에 나갈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학문을 닦았고, 김윤제는 훗날 그를 외손녀와 혼인시켜 뒷바라지했다. 정철은 임억령, 김인후 등 당대 명현들을 만나 시각을 넓혔다. 소박한 팔작지붕 아래서 조선 가사 문학의 거대한 맥이 시작된 셈이다.
마침표는 식영정(息影亭)에서 찍었다. 그림자가 쉬어가는 정자 혹은 그림자를 거두고 신선이 된다는 뜻을 지녔다. 조선 명종 15년(1560)에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 임억령은 담양부사 직을 내놓고 이곳에 은거하며 김성원·고경명·정철에게 시문을 가르쳤다. 정철은 이 교류 속에서 가사문학의 대표작인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식영정 일몰 광주호 위로 해가 넘어간다. 소나무 사이로 스며든 빛이 식영정 마루 위로 길게 늘어진다.
김재근
소쇄원이 젊은 날의 반짝이는 아름다움이라면, 환벽당은 중년의 완숙함이 깃든 우아함이었다. 반면 식영정은 늙어 찾는 이 없는 노인처럼 초라했다. 소쇄원과 환벽당에서 느꼈던 정자의 미덕이 보이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은 울창한 소나무가 답답했다. 축축하고 음산하게 느껴졌다. 성산별곡이 노래하는 멋진 풍경과도 거리가 멀었다. 국가 지정 명승이 초라하게 여겨지기는 처음이었다.
전망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정자 뒤쪽에 있는, <성산별곡>을 새긴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비도 아쉬웠다. 고등학교 고전문학 교과서에 실렸었다. 회초리 때문이긴 했지만 달달 외웠다. 세월이 흐르니 가물거린다.
기억을 되살리려 시비를 살폈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글자 크기도 작을 뿐더러 돌과 너무 조화가 잘 되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가독성 높게 새기고, 현대어 해설을 곁들여 놓으면 식영정을 더 멋지게 감상할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가사문학관의 그 웅장한 건물의 주춧돌 하나 값이면 충분할 것을.
광주호 위로 해가 넘어간다. 소나무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마루 위로 희미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엇던 디날 손이 星山(성산)의 머믈며셔(어떤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성산별곡 시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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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파니스'는 함께 빵을 먹는다는 라틴어로 '반려(companion)'의 어원이다. 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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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의 아름다움은 여전한데 식영정은 왜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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