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 민간사찰 자료
연합뉴스
내부 고발자의 희생이 드러낸 불법사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윤 이병이 폭로한 사찰의 전모가 드러났다. 기무사는 1989년 초 계엄령 상황에 대비해 주요 인사 923명의 검거와 처벌을 위한 청명계획을 입안하고 이들을 등급별로 구분한 '청명카드(체포카드)'를 만들었다. 이들은 ▲A급(계엄목표 달성 결정적 장애자-전민련·전대협·전교협 핵심간부 등) 109명, ▲B급(계엄시책 수행 장애자-민변·민교협·야권 간부 등) 315명, ▲C급(국민 공감대 확보를 위해 처리해야 할 대상자-정부 비판 교수, 교사, 언론인 등) 499명으로 구분됐다. 청명카드에는 주요 인사의 인적사항, 예상 도주로와 은신처, 체포조, 유치 장소 등이 기재되었는데, 계엄령 상황 시 이들을 검거·처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안사 사찰 피해자 147명이 낸 국가배상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하면서 불법사찰의 요건을 제시했다. "구 국군보안사령부가 군과 관련된 첩보 수집, 특정한 군사법원 관할 범죄의 수사 등 법령에 규정된 직무범위를 벗어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평소의 동향을 감시·파악할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개인의 집회·결사에 관한 활동이나 사생활에 관한 정보를 미행, 망원 활용, 탐문채집 등의 방법으로 비밀리에 수집·관리한 경우, 이는 헌법에 의하여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대법원 1998. 7. 24. 선고 96다42789 판결).
이처럼 드러난 불법사찰은 법원의 철퇴를 맞았다. 그러나 비밀정보기관의 불법사찰은 그 속성상 외부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커녕 실태 파악조차 어렵다. 내부 고발자의 폭로나 기관 내부 제보자의 언론 제보를 통해서야 외부로 드러났고, 그것도 '빙산의 일각'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향한 국정원의 불법사찰 또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의 조사 결과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아직은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알 권리'는 비밀정보기관 앞에서 멈춘다
1998년 정보공개법 시행으로 정보공개청구 제도가 도입됐다. 정보공개법 제3조는 "공공기관이 보유·관리하는 정보는 국민의 알권리 보장 등을 위하여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적극적으로 공개하여야 한다"라는 '정보의 공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공개법 제4조 제3항은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정보 및 보안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에서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의 분석을 목적으로 수집하거나 작성한 정보에 대해서는 이 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한다. 비밀정보기관의 사찰 정보에 대해서는 법 적용 자체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2011년 제정된 '개인정보 보호법'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법은 정보주체의 권리로 ▲열람 요구권, ▲처리 정지, 정정·삭제 및 파기 요구권, ▲개인정보의 처리로 인하여 발생한 피해를 신속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구제받을 권리 등을 보장했다. 그러나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 분석을 목적으로 수집 또는 제공 요청되는 개인정보"(제58조 제1항 제2호)의 경우 법 적용을 포괄적으로 제외했다. 사찰 피해자가 본인의 사찰 정보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비밀정보기관을 예외로 두고 있는 '알 권리' 관련 법제로는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진행된 사찰의 실태를 파악할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 2017년 10월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민사찰기록 정보공개청구 시민운동, 열어라 국정원, 내놔라 내파일’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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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놔라 내파일"… 비밀정보기관에 균열을 내다
그러나 2017년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의 제안으로 출범한 '내놔라 내파일 시민행동'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시민행동은 국정원을 상대로 대대적인 정보공개청구 운동을 벌였고 비공개 결정에 대한 취소 소송을 지원했다.
2017년 6월 과거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발족한 '국정원 개혁 발전위원회'는 같은 해 9월 적폐청산 T/F로부터 '정치인·교수 등 MB정부 비판세력 제압활동' 조사결과를 보고 받고 OOO 등의 정치관여 및 업무상 횡령·배임 혐의 등에 대해 수사의뢰를 권고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여기서 국정원 심리전단이 '교육감 규탄 및 구속 촉구 심리전 활동계획'을 작성 및 실행한 사실 등이 드러났다. 이를 근거로 곽 전 교육감은 국정원에 자신의 사찰 정보를 달라고 정보공개청구를 했으나 국정원은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의 분석을 목적으로 수집하거나 작성한 정보에 대해서는 정보공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은 "국가보안법 폐지 또는 국가정보원 개혁 등을 주장하였고, 국가보안법 위반자 석방 촉구 등의 활동을 한 전력이 있어… 국가보안법 위반자 연계인물의 동향 등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 사건 정보를 수집하였는바, 이는 국가정보원의 정당한 직무 수행의 일환으로 수집·관리하던 정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특정 공직자의 비위 첩보, 정치적 활동 등 동향 파악 등을 위한 정보의 수집은 국정홍보나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반대세력(야권, 시민단체 등)의 동태를 조사하고 관찰하는 정치 사찰에 해당할 뿐, 국가정보원법에서 정한 국가정보원의 직무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라며 정보공개 거부결정을 취소했다(서울행정법원 2019. 8. 16. 선고 2018구합61345 판결). 국정원이 항소·상고했으나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이 판결은 확정됐다.
이 소송은 불법사찰의 피해자가 국정원에 보관된 자신의 정보를 청구하여 받아낼 권리가 있다는 중요한 선례를 만들었다. 비밀정보기관의 시민 감시 실태를 역으로 시민이 감시하는, 이른바 '역감시'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보안정보가 아니라 범죄의 증거

▲ 국가정보기관의 불법사찰성 정보 공개 및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 결의안이 지난 2021년 7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230명, 찬성 217명, 기권 13명으로 통과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곽 전 교육감 사건 대법원 판결 이후 2021년 7월 국회 본회의에서는 '국가정보기관의 불법사찰성 정보 공개 및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 결의안'이 의결됐다. 여야 합의로 의결된 이 결의안은 국회 정보위원회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통과시킨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는 국가정보원 등 국가정보기관이 국민의 주권 아래 있음을 분명히 하며 정보 주체로서 모든 국민에게 '대한민국헌법' 제17조에 의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적극적인 권리, 불법적인 정보수집의 대상이 되지 아니할 권리가 있음은 물론 '대한민국헌법' 제21조에 의해 정보공개청구권을 포함한 알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며 국가정보원의 활동이라 할지라도 남용될 경우 사법부와 국회의 민주적 통제의 대상이 됨을 확인한다. (…) 이에 대한민국 국회는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일어나는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침해로써 국민을 불법적으로 사찰하고 공작하는 행위를 완전히 종식시키고 되돌이킬 수 없도록 근절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대한민국 국회는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개인 및 단체에 대한 사찰과 정보 공작 행위가 사실로 드러났음을 확인하며 이에 국가정보원장은 재발 방지와 국민사찰 완전 종식을 선언하고 해당 사찰 피해자와 피해 단체에 대하여 진심 어린 사과를 행할 것을 촉구한다.
2. 대한민국 국회는 국가정보원이 사찰 정보공개 청구인과 단체에 대하여 국가 안보와 무관하며 제3자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정보는 공개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촉구한다."
국가정보원이 사찰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결의안의 취지는 세월호 사찰 사건에도 마찬가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불법사찰은 시민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공격으로 취급되고 범죄로 규정되어야 한다. 사찰 정보를 숨기는 것은 범죄의 증거를 인멸하는 것이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강성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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