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꽃동네’ 일대 모습 2024년 9월 ‘프로젝트 산장’ 등 의정부 청년들이 진행한 ‘빛바랜 꽃동네 연구소’에서 마을의 ‘색’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들. 프로젝트 산장 제공
양은영
기록의 방식이 곧 관점이다
의정부 청년 기획자들이 2024년부터 진행한 '빛바랜 꽃동네 연구소'는 마을을 직접 관찰하고 기록한 작업이다. 외벽의 색, 사물 표면의 흔적, 폐업 뒤에도 남아 있는 간판처럼 행정 데이터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출발점이 됐다.
작업은 사소한 발견에서 시작됐다. 바로 골목에서 본 오래된 '고추장 통'이었다. 햇빛과 공기에 오래 노출되며 바랜 색은 기존의 색이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청년들은 이 통을 시작으로 꽃동네 골목의 색을 수집하고, 인쇄용 색상 모델인 CMYK 같은 표준화된 수치와 '안매운노랑고추장통색', '덧칠된 수영장색' 같은 이름을 함께 붙여 '꽃동네색팔레트'를 만들었다.
시선은 간판으로 이어졌다. 꽃동네에는 폐업 뒤에도 간판이 남아 있었다. 바래고 깨진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불이 꺼진 간판은 행정 기록의 '폐업'이라는 한 줄보다 더 많은 정보를 남긴다. 이곳에 어떤 가게가 있었고, 어떤 생활이 이어졌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년들에게 간판은 골목의 시간을 담은 기록이었다.
이들은 현재 간판과 지도 서비스의 로드뷰를 대조해 사라진 가게의 흔적을 확인했다. 옛 간판의 글자 형태를 따서 틀을 만들고 도로나 벽에 밀착시킨 뒤, 고압 세척기로 주변의 묵은 때를 걷어냈다. '아름다운 꽃이되기' '소소하고 확실하게' 같은 문구가 바닥 위에 다시 드러났다.
'꽃동네색팔레트'가 마을 표면에 남은 변화를 기록했다면, 간판은 그 골목에서 불리고 사라진 이름의 형태를 되살렸다.
행정 통계가 건너뛴 자리를 주민의 기록이 채운 것이다.

▲그림 2. 2024년 10월 의정부 청년들이 사라졌거나 불이 꺼진 상점 간판의 글자체를 본뜬 스텐실 틀을 대고 고압 세척으로 바닥의 먼지와 때를 걷어내 글자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 새로 덧칠하는 대신 ‘닦아냄’으로 흔적을 되살린 기록 방식이다.
프로젝트 산장 제공.
챌린지가 만든 것, 데이터와 데이터의 기준
'빛바랜 꽃동네 연구소'의 방법론을 더 넓은 규모로 실험한 것이 2025년 '마을데이터 챌린지'였다.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와 의정부 청년 기획자들이 함께 진행한 이 프로그램에는 마을활동가와 청년단체 회원 59명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3일 동안 꽃동네를 직접 걸으며 각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정하고, 커뮤니티 매핑과 시각화로 확장해 13건의 마을데이터 콘텐츠를 만들었다.
결과물은 달랐지만 출발점은 같았다. 공공데이터에 없거나 행정 단위로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골목의 위험 구간, 생활권별 동선, 사라진 가게의 자리—을 직접 걸어서 건져 올린 것들이었다. 참가자들이 얻은 것은 기술보다 기준이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할지 스스로 정하는 경험이다. 이 경험이 이어질 때 마을데이터는 축적 가능한 기록으로 남는다.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가 운영하는 '마을공동체 데이터 아카이브'는 이런 흐름을 뒷받침하는 플랫폼이다. 한쪽에서는 마을을 걸으며 데이터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모아 축적한다. 관찰에서 출발한 기록이 흩어지지 않고 쌓일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림 3. 경기도마을공동체데이터아카이브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는 행정 데이터만으로는 담기지 않는 마을의 변화와 생활의 결을 주민이 직접 기록하고 축적할 수 있도록, 주민 주도의 마을데이터 아카이빙과 활용 방안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경기도마을공동체데이터아카이브
마을이 자기 언어를 가질 때
시민이 직접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사회 문제를 드러내는 실천을 '데이터 행동주의(data activism)'라 부른다. '데이터 정의(data justice)'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가 데이터를 만들고, 누가 그 안에서 지워지는가를 묻는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불평등의 문제다. 마을데이터는 이 질문을 골목에서 실천한 것이다.
마을데이터가 바꾸는 것은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마을을 읽는 방식이다. 행정이 정리한 숫자 바깥에 주민이 수집하고 이름 붙인 기록이 더해질 때, 마을은 외부의 언어 대신 자기 언어로 말하게 된다. 그 언어는 정책 협의의 자료가 될 수도 있고, 공동체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으며, 다음 세대가 동네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꽃동네에서 시작된 이 방식이 다른 마을로 이어질 때, 마을을 설명하는 언어의 지도도 달라진다. 언어를 가진 마을은 더 이상 설명의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양은영(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변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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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고추장 통'에서 시작된 의정부 한 마을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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