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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 가야한다는 고딩 딸, 새벽 5시에 차 시동을 켰다

[미국 고딩 엄마로 살아남기] 진짜 같은 특별활동을 지켜보며

등록 2026.04.11 19:22수정 2026.04.11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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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고등학교 시절 후회하는 것 중 하나는 '특별 활동'이라는 시간을 너무 허투루 써버렸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아이들의 관심사를 반영한 활동이라기 보다, 학교니까 있어야 하는 형식적인 프로그램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였을까. 그 시간은 늘 '비는 시간'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조금만 더 들여다봤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취미도, 특기도, 뚜렷한 관심사도 없는 심심한 어른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후회는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시작됐다.


모의재판이랬는데 진짜였다

모의 재판 대회 올해는 North Carolina의 Raleigh 지역에 있는 법원에서 진행되었다.
▲모의 재판 대회 올해는 North Carolina의 Raleigh 지역에 있는 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오영주

미국 고등학교는 저마다 다양한 클럽을 제공한다. 학생들은 각자의 관심사에 맞춰 활동을 선택하는데 진로와 관련된 활동일 수도 있고, 봉사나 취미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건 무엇을 선택 했느냐가 아니다.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성장 했는지다. 그 과정은 입학 사정관에게 한 사람의 인성과 사회성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즉, 대학 입시에서도 성적 만큼이나 중요하게 평가되는 클럽 활동은 미국 고등학생들에게 단순한 '특활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탐색하고,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를 보여주는 과정인 거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클럽 활동은 내가 알던 '시간 때우기'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미국 고등학교의 클럽들은 운영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학교 내에서만 활동하는 것과 다른 학교들과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

그중에 둘째 아이가 활동하고 있는 Mock Trial, 이른바 모의재판 클럽은 연합 운영이기에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 학생들끼리 1년에 한 번씩 모여 모의재판을 연다. 처음엔 솔직히 고등학생들이 변호사 놀이를 하는 정도겠지 싶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회를 앞두고 아이가 하는 말.


"엄마, 옆 동네에 있는 법원으로 가야 해."
".... 어...??"

이건 놀이가 아니었다. 그 모의재판 대회를 어느 학교의 강당에서 책상과 의자를 그럴듯하게 세팅해 놓고 우리끼리 하는 역할극이겠거니 했는데 법원이라니.


학생들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검사와 변호사로 나뉘어 싸우고, 증인을 설정해서 질문을 만들며, 상대의 논리를 예상해 반박을 준비한다. 누군가가 작성해 주는 대본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발언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전부 외워서 대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무대는 실제 법원이고 심사 위원은 전·현직 판사와 변호사들이라는 사실. 아뿔싸,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스케일이었다.

대회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지역에서 우승하면 주(State) 대표가 되고, 더 올라가면 전국 대회로 이어진다. 그리고 각 라운드가 끝나면 상대 팀이 "가장 인상 깊었던 변호사"와 "가장 설득력 있었던 증인"을 한 명씩 뽑아 상을 준다. 여기에 심사 위원들도 전체 참가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와 증인을 따로 선정한다. 결국, 함께 싸운 상대와 전문가 모두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구조다. 그래서 그 상은 단순한 트로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지난 일요일, 우리는 3시간 떨어진 지역의 법원으로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어둠을 뚫고 달려온 길 만큼이나 내 마음도 묘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아이보다 내가 더 떨리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는 더 긴 하루였다. 오전에는 변호사, 오후에는 증인 역할까지 맡았기 때문이다. 보통 하나만 맡는 게 일반적인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두 역할을 떠안았다고 했다. 그동안의 피로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법정 안은 생각보다 훨씬 '진짜' 였다. 판사가 들어오고, 배심원이 앉고, 아이들은 정장을 입고 논리를 펼친다. 공격과 방어가 오가고, 이의가 제기되고, 증인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쓴다. 영어를 모두 알아듣지 못해도 분위기만으로 충분히 느껴졌다. 이건 연극이 아니라, 각자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 이라는걸.

모의 재판 대회 각 팀별로 배정된 법정에서 대회 시작 전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다.
▲모의 재판 대회 각 팀별로 배정된 법정에서 대회 시작 전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다. 오영주

그런데 경기가 끝나갈수록 아이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1라운드가 끝났을 때 눈에 눈물이 고였고, 2라운드가 끝났을 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준비한 만큼 하지 못한 아쉬움, 실수에 대한 자책, 그리고 상을 놓쳤다는 사실. 특히 함께 준비했던 후배가 상대 팀에게 선택 받는 순간, 아이의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진 듯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엄마 옆이라고 찾아와 앉은 아이에게 뻔한 위로라도 건네야 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한 반응에 한숨이 나왔지만 왜 그리 아이의 눈치를 보게 되던지.그 순간 난 아무 죄 없는 죄인이었다. 아이의 감정 하나에 내 표정과 말투까지 조심해야 하는 시간.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그 묘한 '눈치의 순간'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만나는 예상 밖의 세계

모든 일정이 끝나고 심사 위원들이 주는 상의 시상식이 시작됐다. 솔직히 집에 가고 싶었다. 우리 가족 모두 지쳐 있었고, 표정도 이미 바닥이었으며 상대 팀이 주는 상도 못 받았는데 심사 위원이 주는 상에 뽑힐 리가 없다는 계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상이 하나 씩 호명될 때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내 손은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호명 자만을 남기고 짐을 챙기던 그 순간 외쳐진 익숙한 이름.

"…어????"

둘째 아이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가 되면서 들러리가 주인공으로 등극해 버린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내 마음도 지옥에서 천국으로 급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솟구쳤다. 어쩜 이런 극적인 엔딩이라니!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앞에 선 아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이었고 온몸에 달라붙어 날 끌어내리던 무거운 감정들이 한순간 빛 속으로 사라지는 마법을 경험했다. 신성한 법원에서 억지 웃음을 짓던 아이는 활짝 웃는 얼굴로 단체 사진을 남겼고 죄 없는 죄인이었던 나는 무죄를 선고 받았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벽에 출발한 우리는 17시간 만에 집에 돌아왔다. 운전은 남편이 다 했는데 왜 그리 피곤하던지. 생각해 보니 내 멘탈은 하루 종일 옥살이를 한 셈이지 않나.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나는 종종 예상 밖의 세계를 만난다. 처음엔 낯설고 부담스럽지만, 그 끝에는 늘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자라온 시간도 떠올리게 된다. 조금은 형식적으로 흘러갔던 그 시절의 '특별활동'들.

마침 요즘은 한국에서도 새 학기가 자리를 잡아가며, 아이들이 특별활동을 고르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시기다. 그 시간이 단순히 채워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각자의 관심에 따라 스스로를 찾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작은 시작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아이가 보낸 이 하루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마음을 다해 말하게 된다. 네 덕분에, 나는 또 한 번 새로운 세상을 살아봤어.
#미국고등학교 #클럽활동 #모의재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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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주 후 글을 쓰며 초기화 된 제 인생을 스스로 구하는 중입니다. @ 브런치 '주재원, 부인들의 내조 전쟁터' 연재. @ 2026 문학고을 등단 - 상반기 신인 문학상 공모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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