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과 생업, 가사 사이에서 길 찾기

[젠더+노동+건강 ON] 의욕과 죄책감 사이에서 만난 귀인

등록 2026.04.08 09:25수정 2026.04.0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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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몇 년 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아래 한노보연)에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아래 젠더센터)가 시작하면서 이주팀으로 결합해 센터 활동을 이어왔다. 올해부터 젠더센터 센터장 역할을 맡게 됐다.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동료들에게 축하를 겸한 격려와 위로를 받기도 했다.

물론 나 스스로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한 활동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 있기도 하지만, 젠더센터에 대한 애정과 의리, 그리고 한노보연 활동과 회원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결심에 한 몫했다. 이왕 하기로 한 일, 잘 해내자며 올해의 숙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 글은 멋진 센터장다운(?) 얘기가 아니다. 활동과 생업과 집안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중인, 최근 나의 일상과 고민에 대한 두서 없는 이야기다.


생업과 활동 사이를 오가는 일상

지난해 4월, 활동이 챙겨주지 않는 경제적 보상을 확보하기 위해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땄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곧 1년이 된다. 나와 남편, 청소년과 강아지의 동거를 더 잘 해내기 위해 경제적 보탬이 되려고 시작한 건 아니다. 가족 안에서 부여된 나의 역할을 무리 없이 거부하기 위해 경제력을 갖고 싶었다. 이런 마음은 사실 욕심이나 욕구라기보다는 욕망에 가깝다고 여긴다.

경제적으로만 보면 남편이 원하는 대로 '밥해주고 챙겨주는 아내'가 되어 주면 굳이 내가 돈을 벌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활동가를 직업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일, 추구하고 싶은 삶으로 여기고 있기도 해서 크게 금전적 보상을 추구하지 않으며 활동해 오기도 했다. 동거인이 돈을 벌고 있으니, 절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활동 역시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히는 일이라, 나름의 상처와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활동이 챙겨주지 않는 경제적 보상'이라는 말을 일부러 덧붙이며 내 생업의 이유를 만들었던 것 같다. 보험에 대한 사람들의 양가 감정 덕분에 긁히는 마음도 있지만, 새로운 영역을 알아가는 공부도 재미있고 약 1년 동안 맺게 된 계약들도 쌓였으므로 오래 해 볼 마음을 먹고 있다.

보험설계사는 자유 출근이라고 많이들 알고 있지만, 실상은 오전 9시 출근해서 온갖 새로운 시책에 대한 정보를 학습하는 시간 지키기를 요구 받는다. 일을 하다 보니 또 그 요구에 설득 당하기도 한다. 알아야 할 새 상품과 정책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생업을 위한 블로그 운영도 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생업에 쏟아붓는 에너지가 많다. 거기다 생존을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PT와 한 번의 자율 운동까지 지키다 보면, 매일 해치워야 할 일들의 목록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메모해 두지 않으면 놓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가사도우미 분이 다녀간 후 딸이 감탄하며 보낸 사진.
▲ 가사도우미 분이 다녀간 후 딸이 감탄하며 보낸 사진. 림보

빨래가 세탁기를 가로막을 정도로 쌓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탁기가 빨래를 다 해 준다고 말한 사람은 누굴까. 빨래 널고 개고 정리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니,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느 친구가 건조기를 사보라고 했지만, 가전제품을 더는 늘리고 싶지 않다. 로봇청소기 잘 돌아다니라고 식탁 의자 치워두는 것도 힘들어 로봇청소기도 못 쓰는 내가 건조기가 온다고 크게 괜찮아질 것 같지도 않다.

가사 노동이 당연히 내 일이라고 여기는 동거인들과 사는 중인 나는, 그들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도 않고 적당히 타협하기도 싫다. 그러면서도 계속 죄책감에 시달린다. 일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면 얼마나 좋아. 그렇다고 '슈퍼우먼'을 꿈꾸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나를 돌보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은데, 내가 만들지 않은 집안일들까지 해결해야 하니 억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가사도우미를 불러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깨끗하고 먼지 하나 없는 집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쓰레기 집을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일하고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면서도 정리되지 않은 집 때문에 편하지 않았다. 4시간 집안 정리와 청소를 해 주는 분이 오는 데 비용이 7~8만 원 정도였다. 3월 초에 한번 와 주신 분 덕분에 또 그럭저럭 몇 주를 버티고 있다.

의욕과 무력감 사이에서 만난 귀인

활동으로 정신적으로 소진되고 우울감이 심했을 때가 벌써 꽤 지났다. 그때 우리 집으로 온 강아지 소담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된 존재였다. 어느새 여덟 살이다. 자기가 다 키우겠다는 딸의 거짓말에 속아서 입양하게 되었는데, 소담과 함께 지내면서 생기는 일도 결국 나의 몫이었다.

 반려견 소담의 산책인이 보내준 사진.
▲ 반려견 소담의 산책인이 보내준 사진. 림보

그동안은 어떻게든 강아지 소담에 대한 의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루 두 번 산책해야 한다는 건 잘 알았지만, 하루 한 번 꼬박꼬박 산책하기도 솔직히 쉬운 일이 아니다. 동거인 둘은 예쁘다고 쓰다듬을 줄은 알지만, 강아지 용품 빨래도, 털 날리는 집안 청소도, 부탁하지 않는 이상 산책도 하지 않는다.

최근 점점 바빠지면서 산책을 못하는 날이 야금야금 늘기 시작했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소담에 대한 의리는 무너지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몸의 피곤함 만큼, 가족들에게 가사 노동을 나누자는 대화를 시도하는 피로함이 컸다.

결국 '당근' 아르바이트 구인에 글을 남겼다. 시급 1만 4000원, 우리 집 바로 근처에 사는 30대 여성 엔지니어인데, 재택 노동자라고 했다. 이렇게 2주 전부터 하루 한 시간 강아지 산책을 맡아준 분이 생겼다. 알고 보면 귀인이 별 게 아닌 것 같다. 당장의 필요를 해결해 주는 이런 인연이 귀인이 아닐까.

나라는 한 사람의 생활, 고민, 관계 모두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처럼 복잡하고 다층적인 얽힘을 체감한 적은 없었던 듯하다. 활동과 일상 사이, 의욕과 무력감 사이를 오가면서 올바른 말을 떠들지만, 당장의 욕심만을 채우고자 하는 순간의 판단이 뒤엉켜 있는 게 그냥 나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날이 과연 올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4월호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림보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장입니다.
#가사노동 #워킹맘 #일가정양립 #가사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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