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기록화 전봉준과 손병희의 양호 동학의병연합군은 10월 16일(양11.13) 논산 초포 앞 소토산에 진을 치고 백성들에게는 물론 관군들에게도 항일 전선을 구축할 것을 호소하였다. 동학혁명기록화는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동학혁명기념관
고부관아를 점거했다가 스스로 해산한지 80일 만인 1894년 3월 21일 (양 4월 26일) 전북 무장(茂長)의 당산마을 앞 들판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고부 때와는 군중의 수나 조직, 내건 구호, 지휘체계 등이 확연히 달랐다. 1월의 봉기가 다소 자연발생적, 즉발적이었는데 비해 무장봉기는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하고 참여한 혁명적인 집결이었다.
무장에서 시작된 농민혁명은 백산 → 황토현으로 집결지를 옮기면서 수많은 동학인과 농민이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혁명의 진행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고부에서 농민들의 해산과 함께 몸을 숨겼던 전봉준·손화중·김개남·김덕명 등 지도부는 본격적인 혁명을 기포할 장소를 무장으로 결정하였다. 무장은 동지 손화중이 동학접주로 있는 곳이고, 이들 지도부의 지인, 친지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거사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에는 고부관아 점거의 주동 인물로 전봉준 등이 지목되어 조정에 보고되고, 그들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눈에 쌍불을 켜고 이들의 체포에 나섰으나 모두들 변신을 하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관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이들 지도부는 3월 초순부터 농민군을 지휘하게 될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를 조직하였다.
전봉준이 총대장인 동도대장(東徒大將)에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 김덕명·오지영이 총참모, 최경선이 영솔장, 송희옥·정백현 등이 비서에 선임되었다. 대부분이 보은집회 등에 참가했던 동학의 핵심멤버들이었다. 이들은 고부관아를 공격할 때에도 앞장에 섰으며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릴 때에도 서명한 면면들이다.
지도부가 구성되면서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웠다. 동학의 조직을 통해서였다. 그 결과 며칠 만에 수천 명의 동학농민이 집결하였다. 지도부에 속한 인사들이 그만큼 도인과 농민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때 집결된 동학·농민의 수는 8천여 명이고, 영솔자 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솔자와 참여인원 영솔자와 참여인원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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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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