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바람 하나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그것은 감각의 인지보다 빠르고, 논리의 증명보다 명확한 존재의 신호다.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2~3시간을 달려, 육지의 소음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는 경계에 이르면 지도 위에서 외롭게 떨고 있는 점 하나를 발견한다. 여서도. 그곳은 이름처럼 상서롭고 아름다운 섬이기 이전에, 거대한 바람이 빚어낸 고독의 보루(堡壘)다.
바람이 먼저 도착하는 섬
배가 포구에 닿기 전,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것은 파도의 파열음이 아니라 바람의 울림이다. 웅, 웅, 웅... 첼로의 깊은 저음을 긋듯 섬 전체를 휘감고 도는 그 소리는 아마도 모든 시작이 설명되지 않는 파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듯하다.
이 섬이 아주 오래전, 대륙의 일부였다가 바다와 시간에 의해 갈라져 지금의 형상을 갖추었다는 사실은 태초의 어떤 거대한 흔들림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헤겔이 말한 '미세한 최초의 흔들림'이 한 세계를 창조하듯, 여서도는 그 진동을 멈추지 않은 채 먼바다 위에서 자신의 실존을 거칠지만 분명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우리는 흔히 고립을 단절이라 말하지만, 여서도에서의 고립은 오히려 세계와의 가장 뜨거운 접촉이다. 육지에서의 삶이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합의라는 완충 지대를 거쳐 전달된다면, 여서도의 바람은 아무런 필터 없이 자아의 표면을 직접 타격한다.
그 서슬 퍼런 기운은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우고, 의식에 앞선 울림으로 한 사람을 흔들며 세계를 넓힌다. 결국 한 생의 궤도를 다시 그려내는 것은, 이처럼 말로 붙잡히지 않는 맥박에서 비롯된 자기 구원의 몸짓일지도 모른다.
여서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가장 치열하고도 장엄한 성채와 마주한다. 집보다 높게, 지붕을 덮을 듯 위태로우면서도 견고하게 솟은 돌담들이다. 외지인에게 그것은 경이로운 장관일 뿐이나 섬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의 벼랑 끝에서 길어올린 생존의 문장이다. 나무 한 그루 마음 놓고 가지를 뻗지 못하는 이 척박한 고립지에서, 사람들은 바람을 이기려 드는 대신, 그 숨결을 품어 길들이는 법을 배웠다.
삶의 무게로 남은 바람
높은 돌담 사이를 지날 때 들리는 바람의 신음은 알베르 카뮈가 그의 산문 <외딴섬>에서 고백했던 '벌거벗은 진실'과 공명한다.
카뮈는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인생의 부조리를 마주하며, 그 어떤 위안도 덧입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는 생의 의지를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여서도에서 그 진실은 더 이상 사유의 언어에 머물지 않는다. 높은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그것은 이내 구체적인 무게로 손에 잡힌다.
바람을 막기 위해 한 장 한 장 쌓아 올렸을 돌의 높이, 허리를 굽혀야 했던 시간의 깊이, 계절마다 같은 길을 오르내리며 몸에 새겨졌을 노동의 결. 이 섬에서 바람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삶을 시험하는 하나의 조건이며, 그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속일 수 없게 된다.
풍화의 손길은 우리 삶에 덧입혀진 부차적인 허영을 가차 없이 벗겨낸다. 그러나 그 거센 시련의 끝에서 끝내 남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단단함이다.
이 돌담들은 섬의 역사를 증언하는 화석화된 침묵이다. 검고 투박한 돌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댄 채 바람의 길을 터주는 모습은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 거대한 선체의 위용과도 같다. 돌담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의 언어는 아직 문장이 되기 전의 은유이며, 그 틈에 귀를 기울이면 '존재한다'는 말보다 더 깊은 생의 박동이 만져진다.
섬의 남쪽,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해안 절벽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본다. 아주 오래전 이 남해의 섬들 어딘가에 남겨졌을지 모를 선사시대 사람들의 흔적을 떠올리며, 인간이 처음 이 바다를 마주했을 태초의 순간을 상상한다.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빛의 조각들은 바다 위로 흩어지며, 아직 언어라는 틀에 갇히지 않은 태초의 풍경을 연출한다.
이곳에서 빛은 위로가 아니라 사물을 끝까지 꿰뚫는 투명한 시선으로 다가온다. 빛은 바다의 깊이를 재고, 벼랑의 각도를 깎으며, 내면의 숨겨진 주름까지 남김없이 비춘다.
이곳의 바다는 시집오던 새색시의 옷고름을 옥색으로 물들였다는 전설이 전해질 만큼 맑다. 그러나 그 맑음은 신비라기보다 명료함에 가깝다.
경계에서 열리는 가능성
벼랑 끝에서 마주하는 수평선은 막힌 담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열린 문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단애(斷崖)의 끝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 위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필연적인 고립이 우연한 깨달음과 만나는 지점. 여서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에게 침묵의 대답을 건넨다.
섬에는 바람과 소리에 얽힌 소박한 일화들도 전해진다. 누군가 주워 온 작은 풍경(風鈴) 하나가 이 거친 섬에서 오래도록 간직되었다는 풍문처럼, 이곳의 사람들은 거센 바람을 단순한 소음으로 두지 않고 그것을 맑은 울림으로 바꾸려는 마음을 품어왔다.
이제 바람은 더 이상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다. 내 심장 안으로 들어와 함께 웅웅거리는 동반자다. 카뮈가 느꼈듯, 세상의 모든 것이 물러간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지평선 너머로 육지의 소음이 다시 가까워진대도, 내 안에 이식된 여서도의 울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여운은 '아직 문장이 되기 전의 언어'가 되어 끊임없이 묻는다. 너의 생은 여전히 진동하고 있는가, 너의 궤도는 어디를 향해 다시 그려지고 있는가.
벼랑 끝 단애에서 마주했던 빛의 조각들이 마음의 옷고름을 물들일 때, 고립은 스스로 선택한 유배가 되고 고독은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여서도의 바람은 그렇게 지도를 벗어나 한 사람의 세계를 넓히며,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생의 궤도를 다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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