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4.13 15:09수정 2026.04.1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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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첫날, 나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와타시와(나는)…"
몇 번이나 연습했던 문장인데, 휴대폰 너머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3초 쯤이었을까. 체감으로는 훨씬 길었다. 나는 그 찰나의 빈틈조차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퇴근길에서도 늘 무언가 틀어 놓는다. 영상이든, 뉴스든 잠깐이라도 비는 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불안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은 낭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효율과 속도가 정의가 된 세상에서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며칠 전, 퇴근 후에는 기타를 치러 간다는 직장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프랑스에서는 중산층의 기준이 우리랑 다르대요. 아파트 평수보다 연봉보다 악기 하나를 다룰 줄 아는지, 외국어 하나를 구사할 수 있는지를 본다더라고요."
나는 어떤가. 소유하는 것 대신, 내 몸에 오롯이 체득된 감각이 있던가. 음악에는 옛날부터 소질이 없었다. 대신 퇴근길마다 습관처럼 보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사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래 전 사둔 히라가나 책을 다시 꺼냈다. 전화 일본어 강좌를 신청하려는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다.
'완벽한 발음의 AI냐, 실수를 주고받는 사람이냐.'

▲말이 멈춘 뒤에 남은 자리 전화 일본어 수업을 위해 펼쳐 둔 교재.
김영은
기술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AI는 정확하고 빠르며, 편리할 것이다. 말의 오류는 실시간으로 보정될 것이며 거기엔 곤혹스러운 침묵도 미안해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원어민 선생님을 택했다. 빈틈없고 빠른 세상에서, 굳이 조금 더 '불편해지기로' 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도 돼요."
선생님은 서툰 한국말로 안심시켜 주었다. 누군가가 내 서툰 말을 끝까지 기다려 주는 상황이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말이 막혀 답답해할 때면 선생님은 종종 다정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은 벚꽃이 피었어요?"
"요즘 일은 많이 바쁘세요?"
무슨 말로 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문장이 자꾸 끊겼다. 말과 말 사이가 길어질수록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운 정적도 점차 숨 쉴 만한 여백이 되었다. 선생님은 재촉하는 대신 숨을 고르며 기다려 주었다. 서툰 문장이지만 끝까지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짧은 멈춤을 비로소 견뎌내고 있었다.
일본어의 안부 인사말 중에는 '오카와리 아리마센까(변한 것이 없으신가요?)'라는 말이 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냈는지 묻는 인사는, 내게 매일의 단조로운 시간을 다르게 보게 했다. 빠른 성과가 없어도, 눈에 띄게 변한 것이 없어도 우리의 하루는 그 자체로 충분히 괜찮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삶의 가치를 '얼마나 가졌는가'로 판단해 왔다. 더 넓은 집, 더 높은 연봉, 빠른 성과. 하지만 진짜 품격은 소유가 아니라, 비어 있는 시간을 어떻게 채우는가, 그리고 타인의 서툰 순간을 얼마나 넉넉하게 기다려 줄 수 있는가에 있었다. 수업이 끝날 즈음, 선생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몸은 괜찮아요? 뱃속의 아기도 함께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거예요."
친정엄마의 음성처럼 따뜻한 안부였다. 하루는 여전히 평범하고 성과는 더디지만, 나는 이제 안다. 침묵을 함께 견디는 연결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곧 태어날 아이에게 나 역시 서투른 첫 마디를 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이가 될 것이다.
AI 시대에 굳이 외국어를 배우는 건, 단순히 문장을 암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적 속에서도 진심을 주고받는 법과 기술이 대신해 줄 수 없는 타인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이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나만의 감각'은, 결국 이 서툰 기다림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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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 AI 시대에 외국어를 배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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