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가 건네준 맛있는 환대, 흑돼지

[제주 봄 기행 14] 돗통시의 생명 순환과 고사리·멜젓이 빚어낸 맛

등록 2026.04.13 09:19수정 2026.04.1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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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행의 허기를 달래주는 최고의 대명사를 꼽으라면 단연 흑돼지다. 노릇하게 구워진 기름진 맛과 입안 가득 터지는 육즙은 여행자의 입맛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녔다. 흔히들 '제주도' 하면 흑돼지를 떠올리지만, 사실 이 검은 털의 돼지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니다. 예전 시골 고향 우리에서 키우던 친근한 '꺼먹돼지'가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대륙의 혈통과 섬의 생명력이 빚어낸 역사​


​흑돼지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멀리 고구려 시대 만주 대륙의 흔적과 만난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소형종 돼지들이 한반도를 거쳐 바다 건너 제주의 품에 안겼고, 이곳의 특수한 환경에 정착하며 고유한 형질을 지켜온 셈이다.

 제주도 자부심을 가진 흑돼지. 지방 조직이 견고하고 근섬유가 가늘어 식감이 부드럽고 쫄깃한 맛을 선사한다. 제주 여행에서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데, 기름진 맛과 입안 가득한 육즙이 여행자들의 입을 즐겁게 한다.
제주도 자부심을 가진 흑돼지. 지방 조직이 견고하고 근섬유가 가늘어 식감이 부드럽고 쫄깃한 맛을 선사한다. 제주 여행에서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데, 기름진 맛과 입안 가득한 육즙이 여행자들의 입을 즐겁게 한다. 전갑남
제주의 척박한 토양과 거친 바닷바람은 돼지들에게 강인한 생명력을 요구했다. 그 혹독한 세월 속에서 살아남은 개체들은 점차 제주만의 단단한 형질을 굳혀 갔다. 이런 역사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아, 2015년에는 '제주 재래돼지'라는 이름으로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550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제주 흑돼지는 섬 특유의 지혜가 담긴 공간, '돗통시'를 통해 제주 사람들과 긴밀하게 공생해 왔다. 성읍민속마을의 옛 집터에서 마주했던 돗통시는 단순한 화장실이나 돼지우리가 아니었다. 돌로 담을 쌓고 지붕 없는 변소를 만든 그곳은 척박한 화산토를 비옥하게 일구기 위한 '생명 순환의 거점'이었다.

돼지는 인분과 음식 찌꺼기를 처리하며 섬의 청결을 유지했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배설물은 보리농사에 필수적인 천연 비료인 '돗거름'이 되어 다시 인간을 먹여 살렸다.

오랜 기다림으로 완성된 '귀하신 몸'


​오늘날 우리가 식탁에서 마주하는 이 검은 돼지는 사실 대단한 인내의 산물이다. 제주에서 흑돼지는 생각보다 훨씬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일반 돼지가 보통 6개월이면 출하되는 것과 달리, 흑돼지는 8개월에서 9개월 이상을 길러야 비로소 제맛이 나기 때문이다. 사육 기간은 길고 새끼 수도 적어 농가의 정성이 배로 들어가지만, 그 긴 기다림은 일반 돼지와 차별화된 깊은 풍미를 완성한다.

내륙의 돼지들이 효율성을 위해 개량종으로 바뀔 때도, 제주의 지형적 특성 덕분에 이 고유의 형질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행운이다.


​과학적으로도 흑돼지는 일반 돼지에 비해 지방 조직이 견고하고 근섬유가 가늘어 식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다. 여기에 제주 특유의 기후와 깨끗한 물이 더해져 잡내 없는 고소한 육질이 완성된다. 특히 불판 위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멜젓(멸치젓)에 고기 한 점을 푹 찍으면 맛의 신세계가 열린다.

 9개월의 기다림이 빚어낸 제주도 흑돼지구이 기본 상차림. 불판에 오르기 전의 ‘귀하신 몸’의 자태가 먹음직스럽다.
9개월의 기다림이 빚어낸 제주도 흑돼지구이 기본 상차림. 불판에 오르기 전의 ‘귀하신 몸’의 자태가 먹음직스럽다. 전갑남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서 막 건져 올린 고기를 멜젓에 적시는 순간, 흑돼지의 묵직한 기름진 맛을 멜젓의 짭조름한 감칠맛이 빈틈없이 감싸 안으며 입안 가득 제주 바다와 대지가 공존하는 듯한 깊은 풍미를 선사한다. 그 순간, 말이 필요 없었다.

제주 바다와 대지가 차려낸 풍성한 환대​

​미식의 정점은 고기 곁에 놓인 제주 고사리에서 완성된다. 서귀포의 한 식당에서 만난 세라믹 불판 위에는 두툼한 오겹살과 함께 줄기가 굵고 향이 깊은 고사리가 자리를 잡았다. 배수가 잘되는 현무암 토양과 봄철 안개비 덕분에 '산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리는 제주 고사리는 육지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통통한 식감을 자랑한다.

식탁 사이를 오가며 서빙하는 주인아주머니의 솜씨가 능숙하다. 불판 위 고사리가 줄어드는 것을 보더니 아주머니는 넉넉하게 한 대접을 더 내어놓으며 웃으신다.​

"다른 건 몰라도 고사리만큼은 얼마든지 갖다 드세요. 제주 고사리는 통통하고 씹히는 맛이 아주 좋아서 육지의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죠."

 노릇노릇 구워지는 흑돼지. 통통한 식감을 자랑하는 고사리와 제주도 흑돼지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노릇노릇 구워지는 흑돼지. 통통한 식감을 자랑하는 고사리와 제주도 흑돼지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전갑남
아주머니의 정성 섞인 자랑을 들으며 돼지기름에 구워진 고사리를 곁들이니 고기의 풍미가 한층 더 깊어진다. 아삭한 묵은지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고기의 어우러짐은 서로의 맛을 끌어올리며 미식의 절정으로 다가왔다. 식당 창밖으로는 거대한 조각품 같은 산방산의 웅장한 실루엣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식사의 운치를 더해준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제주 서쪽 바다는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해가 만든 주황빛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그 포근한 풍경 속에서 아내가 내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여보, 고사리는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고기의 콜레스테롤 흡수를 낮춰준대요. 게다가 돼지고기에 많은 비타민 B1은 고사리랑 같이 먹을 때 몸에 흡수가 훨씬 잘 된다니, 정말 최고의 궁합인 것 같아. 우리도 집에 가면 꼭 이렇게 한번 구워 먹어봐요."

​아내의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제주에서의 한 끼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그 땅의 역사와 풍토를 맛보고 삶의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성읍민속마을 돗통시에서 보았던 옛 선인들의 지혜부터 '귀하신 몸' 흑돼지의 깊은 맛, 그리고 산방산의 기운까지. 모든 순간을 배낭에 고이 갈무리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제주가 건네준 맛있는 환대 덕분에 남은 여정도 한결 든든해질 것 같다.
#제주도 #흑돼지 #제주도고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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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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