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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이드른 거, 뚱뚱한 거, 팥 드른 눔... 장사 하려면 배울 게 많다

[빌라촌 편의점 이야기] 동네 노인들의 아이스크림 주문법

등록 2026.04.14 13:53수정 2026.04.1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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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바람이 부는 서울의 전형적인 서민 동네에서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며 만나는 신산하기도, 따뜻하기도 한 이야기들을 전합니다.[기자말]
지난해 봄, 아내가 집 앞에 조그만 편의점을 냈다. 아내가 바쁠 땐 종종 일을 거드는데, 한 번은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시며 대뜸, "아스크림이 얼마여?" 하신다.

"네? 종류마다 다 다르죠, 찍어봐야 알아요."
"아 긍께, 찌이드른 거(하시며 검지 손가락을 세워 위아래로 흔드신다, 길다랗게 생긴 걸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네, 그러니까 찌이드른 거도 여러 가지라 이름을 알아야 해요."
"거 참 귀찮어 죽겄네, 형님! 그거 가지구 와봐유, 봐야 안디여!"

 가게가 좁아 밖에 둔 아이스크림 냉장고.
가게가 좁아 밖에 둔 아이스크림 냉장고. 서정호

할머니가 다시 밖으로 나가시려는데, 다른 할머니 한 분이 이미 그 찌이드른 비비빅을 맛나게 빨며 들어오신다. 가게가 좁아 밖에 둔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꺼내 드신 것.

"아이고, 어르신, 계산 찍고 드셔야지요."

해도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시는 건지 다른 말만 하신다.

"이 찌이드른 거 말고 밖에 있는 뚱뚱한 거슨 얼마여?"
"뚱뚱한 거요? 뭐지?"
"아, 있잖여, 팥 드른 눔!"


우리 동네는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서울의 전형적인 빌라촌이다. 동네 어르신들의 주 휴식처는 우리 편의점 옆 어린이 놀이터. 겨울철을 빼고는 어르신들이 일 년 내내 거기 모여 노신다. 인근에 경로당이 있지만 가지 않으신다. 놀이터 파고라에 앉아 놀면서 지나가는 사람도 구경하고, 노는 아이들 구경도 하고, 무엇보다 답답하지 않아 좋으시단다.

어르신 여럿이 모여 계시면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종종 군것질 거리를 사다 드린다. 평소 어르신들 간식을 자주 드리는 사람들도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닌 듯 보인다. 이삿짐센터 직원들, 건물철거업체 사장 그리고 한 사람은 냉동트럭으로 육류를 납품한다. 주로 그들 서넛이 지난 여름 내내 어르신들 아이스크림 사드린 것만 해도 제법 될 거다.


그들이 "어르신들 아이스크림 뭐로 드실래요?" 하면, 내게 한 것과 똑같이 각자 주문하신단다. "난 찌이드른 거", "난 뚱뚱한 거", "나는 팥 드른 눔으루"라고. 아무리 이름을 알려드려도 그 때뿐이란다. 기억을 못 하시는 게 아니라 기억을 안 하시는 것 같단다. 그리 말해도 척척 알아듣고 사 오니까.

아이스크림뿐 아니라 뭐든 그렇게 주문하신단다. "파삭 부서지는 눔" 하면 웨하스고, "달달이 핥아먹는 눔" 하면 크림빵이란다. 동네 장사 하려면 배울 게 많다. 어르신들의 언어를 파악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들의 사투리를 알아듣는다고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 어르신들에게 군것질거리를 사다 드리는 이들처럼 계산 없는 마음이 되지 않고는 이른바 '동네인심'을 얻을 수 없다.

날이 따뜻해지며 놀이터 어르신들의 군것질이 다시 아이스크림으로 바뀌고 있다. 13일도 기온이 쑥 올라가더니 냉동차 아저씨가 찌이드른 비비빅, 뚱뚱한 돼지바, 그리고 팥드른 눔 붕어 싸만코를 사간다. 계절이 한 번 돌아왔으나 지난여름의 어르신들 모두 나와 계신단다.

누군가 "동네가 물이 좋아 그런가, 어째 아프신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네" 하기에, "아니, 똑같은 수돗물인데 서울에 물 좋은 동네가 따로 있어요?" 했더니 "그건 그러네" 하고 피식 웃는다. "물 좋은 동네라..." 혼잣말을 되뇌며 봄빛이 좋아 문을 열고 나가 서는데, 길 건너 건설사마다 매달아 놓은 '재개발 환영' 현수막들이 봄바람에 흔들흔들 저희끼리 신이 났다.
#편의점 #재개발 #서민 #동네 #소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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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DJ, 라디오와 TV PD 로 방송현장에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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