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관리를 시장에만 맡길 수 없는 이유

[시장에 맡겨진 노동자 건강 ①] 안전보건체계 공공성 강화 방향으로 정책 재구성해야

등록 2026.04.13 10:19수정 2026.04.1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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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을 사용하는 작업장에서는 공기 중 납 농도를 정기적으로 감시하는 작업환경측정제도가 있다. 납을 사용하는 노동자들은 납 노출 수준을 역시 정기적으로 검사받는 특수건강진단 제도의 대상이다. 그런데 얼마 전 노동자 다수의 혈중 납 농도가 10μg/dL을 초과한 전력이 있는 한 납축전지 제조 사업장에서, 작업환경 개선 대신 노동자에게 중금속을 체외로 배출시키는 킬레이션 치료를 시행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작업환경의 위험을 확인하고 개선하기 위한 제도를 둔 것인데, 작업환경은 그대로 둔 채 측정 수치만 낮추려는 꼼수다. 게다가 킬레이션 치료는 부작용도 클 수 있어 함부로 시행해서는 안 되는 치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 제도는 오랫동안 하나의 뚜렷한 특징을 지녀 왔다. 사업장의 안전과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는 핵심 제도들이 상당 부분 '시장'을 통해 운영되어 왔다는 점이다. 작업환경측정, 특수건강진단, 보건관리, 안전관리 등 주요 제도는 대부분 민간기관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업장이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로 작동해 왔다. 법은 사업주에게 안전보건 관리를 하라고 정하고 있지만, 실제 수행은 시장에 맡겨져 있는 셈이다. 이러한 구조는 일정 기간 동안 산업안전보건 서비스를 빠르게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 서비스가 실제로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최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아졌지만, 현장의 변화는 크지 않다. 사고와 직업병은 반복되고 있고, 현재의 안전보건 관리가 예방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시장 중심의 체계는 예방보다는 사후 대응에 머물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크고, 특히 위험이 높은 취약 사업장일수록 더 나은 관리가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제는 오랫동안 시장에 맡겨져 온 안전보건관리 구조를 점검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방향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점이다.

시장에 맡겨진 안전보건체계의 형성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노동자의 건강 상태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특수건강진단은 전국의 지정 의료기관에서 수행되며, 대부분 민간 의료기관이 담당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특수건강진단 대상자는 약 200만 명에 이르며, 관련 시장 규모 역시 상당히 확대됐다. 보건관리와 안전관리도 유사한 구조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은 보건관리자나 안전관리자를 직접 선임해야 하지만, 중소 사업장은 외부 전문기관에 업무를 위탁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업장에서 위탁 방식이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구조는 1980~1990년대 산업안전보건 제도가 확대되던 시기에 형성됐다. 당시 정부는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증가하는 위험을 공공의 역량만으로 관리하기 어려웠고, 민간기관을 활용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일정 기준을 마련하고 민간이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방식은 제도를 빠르게 확산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구조는 하나의 '안전보건 시장'을 형성하게 됐다. 사업장은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됐고, 제공 기관은 경쟁 속에서 운영된다. 문제는 안전보건이 본질적으로 시장 논리에만 맡기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점이다.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문제는 단순한 거래 관계로 환원할 수 없는 공공적 성격을 갖고 있다.


한편, 공공이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근로자건강센터다. 2011년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이 센터는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에게 직업건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공공 인프라로 기획됐다. 근골격계질환 예방 상담, 직무스트레스 상담, 작업환경 개선 자문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전체 노동자, 특히 취약한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에게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결국 근로자건강센터는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제한된 예산과 인력, 불명확한 역할 설정 등으로 인해 기존 시장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장 중심 구조가 만들어낸 문제들


시장에 맡겨진 안전보건체계는 몇 가지 구조적 문제를 낳고 있다. 첫째는 사각지대의 발생이다. 시장은 수익성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안전보건 서비스 역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업장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50인 미만 사업장이나 영세 사업장은 상대적으로 충분한 서비스를 받기 어렵다. 이러한 사업장은 위험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음에도, 관리 역량은 오히려 부족하다. 시장 구조는 취약 사업장을 자연스럽게 배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둘째는 비용 지불 구조에서 비롯되는 왜곡이다. 현재 대부분의 안전보건 서비스 비용은 사업주가 부담한다. 이 경우 서비스 제공 기관은 노동자의 건강 보호보다 사업주의 요구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특수건강진단을 앞두고 납 노출 노동자에게 킬레이션 치료를 실시해 혈중 납 농도를 낮추려 했던 사례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하는 주체가 서비스를 좌우하는 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셋째는 사업장 내부 역량의 약화다. 보건관리와 안전관리를 외부에 위탁하는 구조가 일반화되면서, 사업장 내부에 안전보건 관리 역량이 축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위험성평가나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운영은 노동자의 참여와 현장 중심 관리가 핵심이지만, 외부 위탁 중심 구조에서는 이러한 기능이 형식적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일부 기업에서 안전보건관리자를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사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안전보건이 기업 경영의 핵심이 아니라 비용 절감 대상 또는 외주 서비스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는 효과 평가의 부재다. 현재 제공되는 안전보건 서비스가 실제로 노동자의 건강을 얼마나 보호하고 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는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시장 구조에서는 기존 방식이 반복되고, 서비스의 실질적 효과보다는 선택 가능한 상품'으로서의 경쟁이 강조된다. 그 결과, 안전보건의 궁극적 목표인 건강 보호는 상대적으로 뒷전에 밀려나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새로운 노동 형태에서도 반복된다. 플랫폼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소득, 높은 노동 강도 등 노동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정책은 종종 특수건강진단과 같은 의료적 관리 방식으로 접근하려 한다. 이는 근본적인 노동조건 개선보다는 기존 시장 구조 안에서 관리 가능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전보건체계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근로자건강센터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단순한 상담 중심 기능을 넘어, 소규모 사업장의 직업 건강 관리를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지역 기반 공공 인프라로 발전시켜야 한다. 예방 중심 관리, 직업병 조기 발견, 작업환경 개선 지원 등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재정과 권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둘째, 안전보건 서비스에 대한 공적 관리와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 단순한 인증 중심 관리로는 서비스의 질을 담보하기 어렵다. 노동자의 건강 보호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하고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형식적이고 실효성이 낮은 제도나 관행은 과감히 정비해야 한다. 민간 의료기관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내 의료 체계의 문제를 고려할 때, 공공의 산업보건 업무 수행을 전적으로 공공이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치와 제도를 중심으로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셋째, 사업장 내부의 안전보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외부 위탁에만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내부에 전문 인력을 안정적으로 배치하고 노동자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안전보건관리자를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관행 역시 재검토가 필요하다.

넷째, 새로운 노동 형태에 대응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플랫폼 노동과 특수고용 노동 등 기존 제도 밖에 있는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단순한 서비스 제공 방식으로 접근하기보다, 노동조건 개선과 사회적 보호 체계 강화라는 방향에서 다루어야 한다.

시장이 아닌 사회적 인프라로

산업안전보건은 단순한 서비스 시장이 아니라 사회적 인프라에 가깝다.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문제를 시장 경쟁에만 맡겨 두는 것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는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규제를 강화해 왔다. 그러나 안전보건체계의 '구조' 자체를 돌아보는 논의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제는 시장 중심의 구조가 과연 노동자의 건강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산업안전보건 제도가 도입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반복되는 사고와 직업병을 경험하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안전보건을 시장에 맡겨 온 구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4월호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김형렬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으로, 직업환경의학전문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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