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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사기충천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 45] 연전연패의 소식에 놀란 정부

등록 2026.04.15 15:19수정 2026.04.1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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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기록화] 동학혁명군 백산봉기도 동학혁명군 백산봉기도는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기록화이다. 그림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장군이 보국안민 깃발 앞에 나란히 함께하고 있다. 본 그림의 사진은 현재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동학혁명기록화] 동학혁명군 백산봉기도 동학혁명군 백산봉기도는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기록화이다. 그림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장군이 보국안민 깃발 앞에 나란히 함께하고 있다. 본 그림의 사진은 현재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동학혁명기념관

동학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고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초토사 홍계훈의 방문 따위에 겁을 먹거나 '회개'하여 전선을 떠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9일이 되어서야 경병 160명과 향병 200명을 금구와 태인으로 투입하고, 14일에는 선발대 2대를 무장으로 내려 보냈다. 이런 정도의 군사로는 1만에 가까운 농민군을 대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라병사 이문영이 전라좌우도에 징병령을 내려 군사의 모집에 나섰다. 징병령은 소연한 민심을 더욱 어지럽혔을 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간신히 끌어 모은 장병의 수는 몇 백 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을 각 고을관아에 배치했지만, 강제로 끌여 온 농민들이 관복을 입고 관군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춘향이 노릇이었다. 숫적으로도 중과부적이었다.

장성의 황룡촌에서 다시 한번 접전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 큰 전투이다. 전봉준은 4월 21일 군사를 이끌고 장성 황룡촌에 이르러 월평 삼봉(三峰)에서 진을 쳤다. 이를 정탐한 홍계훈은 다음날인 4월 22일 관군 300명을 동원하여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날 오전 동학농민군 4~5천 명이 황룡촌에 집결하여 점심식사 중인 것을 탐지한 관군이 대포 2문으로써 포격을 가하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관군이 먼저 공격한 것이다. 관군은 숫적으로 열세이지만 대환포를 쏘면서 농민군의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황토현에서 이미 관군의 역량을 시험해 온 농민군은 관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때의 농민군의 행렬을 일본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동학당의 실력을 살펴 보건데 4천명, 그 가운데 2천명은 화승총을 가졌고, 기병 1백 명은 2열로 나뉘어 수색에 종사하고 있다. 그 동작은 양식조련과 닮아 지방민을 감복케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황룡촌 전투에서도 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관군지휘자가 공명심에 들떠서 전열이 갖춰지기도 전에 대포를 쏘는 등 서두르다가 농민군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농민군도 40~50명이 사망하는 큰 희생을 치렀지만, 전과는 승리한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동학농민군은 대관 이학승을 죽이고, 야포 2문과 양총 1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황룡 전투와 관련하여 관변의 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출전 장병이 당황하며 달려와 말하기를 관군이 장성 월평에 닿았을 때 그들 무리(동학군)가 마침 황룡촌에 이르러 서로 접전하며 '구드프포' 한 방을 쏘니 그들에게 맞아 죽은 자가 가히 수백이라. 그들 1만여 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격해와 30리 지경까지 추격해 왔다. 그들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어서 피곤하여 자빠지며 창황히 본진으로 돌아왔으나 대관 이학승은 칼을 휘두르며 뒤에서 싸우다가 병정 5명과 더불어 그들에게 죽었다. 그리고 '구드프포' 1좌와 '회선포' 및 탄환을 잃었다.(<동학란기록(上)>·양호초토록)


농민군과 전투에서 거듭 패배한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면서 청나라 군대를 불러오도록 건의하였다. 홍계훈의 증원 요청을 받은 정부에서는 16일 강화도에 주둔한 수비병을 전라도에 파견키로 하는 한편 김문현을 전라감사에서 파면하고 외무협판 김학진을 후임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진을 계속하던 동학농민군은 방향을 바꾸어 25일 정읍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한번 관아를 장악하고 태인 → 금구를 거쳐 26일에는 전주성 인근인 삼천(三川)에 도착하여 포진하였다. 농민군은 북상하던 중 태인 원평리에서 경군을 위문하기 위해 내탕금 1만냥을 갖고 왕명을 받고 내려온 선전관 이주호와 부하 2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전날 왕의 윤음을 전달하러 왔던 초토사 종사관 이효응, 배은환과 함께 이들을 원평 장터에서 참수하였다.


연전연패의 소식에 놀란 정부에서는 4월 27일 이원회를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로 임명하고, 홍계훈의 군대를 통제할 권한과 강화·청주지역의 군사를 호남에 파견하면서 이들의 지휘권을 이원회에게 주었다. 이후 이원회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횃불 #촛불 #동학농민혁명 #응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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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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