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살랑살랑 부는 날,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것

운봉-주천 구간 14.7km... 5시간 30분을 걷다

등록 2026.04.14 15:26수정 2026.04.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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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하루 일과는 정해진 대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제 시간에 맞춰 출근해야 하고, 근무지에서도 규정에 따라 행동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 싶다. 반면, 노후에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 일터가 없거나, 하루 내내 바쁜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 이라면, 한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태해지거나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취미 활동 등 자신만이 만족할 수 있는 즐길 거리를 찾는 것이 아닐까.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것, 내게 있어 인생 후반부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 주는 최고의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지리산둘레길 매주 토요일이면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소풍 가는 날이다.
▲지리산둘레길 매주 토요일이면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소풍 가는 날이다. 정도길

지리산 서북능선 조망하며 걷는 길

매주 토요일이면 소풍날이라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도시락을 준비하고 산행에 필요한 물건을 챙긴다. 물론, 배낭만 짊어지면 집을 나서도 괜찮을 정도로 준비는 해놓지만, 그래도 때마다 다른 상황으로 준비물 확인은 필수다. 또 모임 장소까지 거리와 시간, 가는 방법까지 사전에 숙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방심해서 고속도로 톨게이트 하나 지나치면 약속 시간은 엇나가고 만다.

지난 11일, 다섯 번째 참여하는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는 '운봉~주천'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남원시 장안리 외평마을과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7km의 거리다.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 운봉고원의 너른 들과 6개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 길로,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 있는 구간이다.

회덕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남원장으로, 노치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은 운봉장으로 보러 다녔던 길이다. 주요 경유지로는 운봉읍 서림공원에서 출발하여, 행정마을, 가장마을, 노치마을, 회덕마을, 구룡치, 내송마을 그리고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 도착이다. 고도는 운봉 550m, 주천 170m의 높이로 난이도는 보통 이하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지리산둘레길 봄철 모내기를 위한 준비작업이 한창이다.
▲지리산둘레길 봄철 모내기를 위한 준비작업이 한창이다. 정도길

출발지인 서림공원 옆으로 흐르는 람천은 양쪽으로 벚꽃이 활짝 폈다. 지난주 불그스레하게 미소 짓던 꽃망울은 활짝 웃음으로 꽃을 피웠다. 봄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발걸음도 상쾌하다. 20여 명이 참여하는 회원 중 예닐곱 명은 첫 회부터 계속 참여자로 함께해 반갑게 인사도 나눈다.


읍내 거리에는 다가오는 25일, 제30회 지리산 운봉 바래봉철쭉제 기념식이 열린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지리산 서북능선에 걸쳐있는 바래봉은 대표적인 지리산권역에서 열리는 철쭉꽃축제로 산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인기를 모으고 있다.

람천 벚꽃 남원 운봉읍을 흐르는 람천 주변으로 벚꽃이 활짝 폈다.
▲람천 벚꽃 남원 운봉읍을 흐르는 람천 주변으로 벚꽃이 활짝 폈다. 정도길

"전쟁 난 줄 알았네..."


람천 벚꽃 길을 걷는데 마주 오던 할머니 한 분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건넨다. 무슨 말인가 의아해 하던 중 곧 의문이 풀렸다. 할머니는 베레모와 비슷한 알록달록한 모자와 배낭을 짊어지고 열을 맞춰 걷는 군인들의 모습을 연상하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3열이나 때로는 2열로 맞춰 걷는 것이, 꼭 군인이 행진하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할머니 말 한 마디로 짧은 즐거움을 뒤로하고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에 도착했다.

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회원.
▲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회원. 정도길

안내문을 읽어보고 숲 한 바퀴를 돌았다. 행정마을숲 서어나무는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수종은 개서어나무이다. 잎 끝 꼬리가 길고 털이 없는 것이 서어나무, 꼬리가 짧고 털이 있는 것이 개서어나무로, 남부지방에는 거의 개서어나무가 서식한다고 한다. 100제곱미터의 면적에, 수고 20m 흉고 직경 약 70cm 크기로, 70여 그루가 식재돼 있다.

약 200여 년 전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심고 가꾼 숲으로, 2000년 산림청 주관 제1회 전국 숲 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의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서어나무 숲은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탐방객들에게는 필수코스로, 꽃 피는 5월 다시 찾고 싶어진다.

서어나무 행정마을숲 서어나무, 2000년 산림청 주관 '제1회 전국 숲 대회'에서 대상 수상.
▲서어나무 행정마을숲 서어나무, 2000년 산림청 주관 '제1회 전국 숲 대회'에서 대상 수상. 정도길

지리산둘레길 '운봉~주천' 구간은 비교적 평탄 길이 많다. 강변과 들길 그리고 마을 안길을 지나면서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공부하는 시간이 즐겁다. 1시간 여 넘게 편안한 길을 걷다 보니, 숲길이 그립다. 그래서 사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편안하면 지루해 하고, 좀 힘들면 쉬운 것만 생각난다. 그럴 즈음, 숲길로 접어든다.

솔잎이 떨어져 쌓인 길은 푹신한 스펀지 느낌이다. 휘어진 키 큰 소나무가 하늘을 덮었다. 층층이 겹이 진 두꺼운 소나무 껍질을 보니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 낸 느낌이다. 연륜의 상징으로 거북등처럼 깊게 골이 파인 모습에서 고난과 역경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소나무 숲길 솔잎이 떨어져 푹신한 길을 걷고 있는 토요걷기 회원들.
▲소나무 숲길 솔잎이 떨어져 푹신한 길을 걷고 있는 토요걷기 회원들. 정도길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유일한 마을

걸은 지 2시간 만에 노치마을에 도착했다. 노치마을은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 유일한 마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목돌(목조임석) 5개가 유리관 안에 전시돼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백두대간은 물론 한반도 주요 길지 혈맥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의 기와 맥을 끊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남원문화원에 따르면 "이 목돌 역시 일제가 백두대간의 맥을 끊기 위해 노치마을 앞들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40m 방죽을 파 지맥을 끊었고, 그 안에 목돌 3기(6개)를 설치했다"고 한다. 당시 일제 만행을 알려 역사 의식을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마을 앞으로 길게 뻗어진 지리산 서북능선, 정령치, 세운치, 팔랑치, 바래봉을 거쳐 인월까지 약 7시간이 걸리는 14.4km 구간을 조만간 걸어 보고 싶다.

목돌(목조임석) 노치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의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설치한 목돌이 전시돼 있다.
▲목돌(목조임석) 노치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의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설치한 목돌이 전시돼 있다. 정도길

두 나무가 하나 된 소나무 앞에서 일행이 멈춰 사진을 찍는다. '사랑은 하나이어라'라는 안내판에는 연리지라 소개하는데, 연리목이 아닐까 싶다. 연리지는 나뭇가지들이 자라면서 서로 붙어 한 몸이 된 것이고, 연리목은 두 그루의 나무가 한 몸이 되어 자란 것을 말한다. 이 소나무는 누가 봐도 가지가 아닌 밑동부터 자란 나무(줄기)로 연리목이다. 고도로 인한 기온 차 때문일까, 때늦게 핀 진달래도 수줍은 모습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구룡치에서 잠시 쉬어간다. 구룡치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고개다. 옛날 주천면 주민들이 운봉장을 오가던 사람들과 장사꾼들의 쉼터였다는 것. 또 조경남 의병장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는 역사적인 장소로, 수려한 기암절벽과 남원 8경 중 하나인 구룡폭포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로도 유명하다는 안내자의 설명이다. 이제부터는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한참 이어진다. 역코스로 걷다 보니 수월하게 걷는 편이다. 반대로 오르막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에서 힘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구룡치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을 가진 구룡치에서 잠시 쉬어 간다.
▲구룡치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을 가진 구룡치에서 잠시 쉬어 간다. 정도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물소리를 들으니 상쾌한 느낌이다. 평지가 나타나는 것을 보니 목적지를 눈앞에 둔 것 같다. 전북천리길 개미정지 서어나무쉼터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이곳에는 지리산둘레길 스탬프를 찍는 곳이라 책자를 꺼내 도장도 찍었다.

벌써 다섯 개의 스탬프가 책장 양쪽을 메웠다. 하나씩 늘어 날 때 마다 기분은 배로 느는 느낌이다. 한 분이 사과와 떡 한 조각을 권하기에 받아먹었다. 달콤한 맛이 온몸의 피로를 씻겨 주는 것만 같다. 평소 산행할 때 물 외는 간식을 챙기지 않는 편이라 의외로 좋은 느낌이다.

서어나무쉼터 지리산둘레길 운봉~주천 구간 스탬프 찍는 곳.
▲서어나무쉼터 지리산둘레길 운봉~주천 구간 스탬프 찍는 곳. 정도길

지리산둘레길 운봉~주천 구간으로 14.7km에 5시간 30분을 걸었다. 종착지인 외평마을은 원터마을이라고 안내판에 소개돼 있다. 원터마을은 과거 여행자들이 쉬어가던 숙소인 '원', 혹은 '역원'이 있던 곳이라 불렸다. 1390년경 채씨와 정씨가 터를 잡아 살았고, 옛날 원님이 말을 갈아타고 이곳에서 쉬어가는 곳이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가 지나는 길목으로, 당시 이순신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간 여정을 담은 구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간을 내어 이순신 장군의 고독한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역사 의식을 고취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 남원시 주천면 외평 2길 5에 자리한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 남원시 주천면 외평 2길 5에 자리한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 정도길

다섯 번째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 운봉~주천 구간도 무사히 마쳤다.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접수하는 참가자 모집에 신경을 써 빠트리지 않아야겠다. 그래야 일주일 만에 느끼는 행복을 다시 맛 볼 것이 아닌가. 아래는 주요 경유지와 소요시간의 기록이다.

- 지리산둘레길 운봉~주천 구간 주요 경유지 및 시간표(총 14.7km, 5시간 30분)
운봉읍(09:35) ~ 양묘장(1.4km) ~ 행정마을(10:13, 1.7km) ~ 가장마을(2.2km) ~ 노치마을(11:33, 2.2km) ~ 회덕마을(2.0km) ~ [점심시간 12:00~13:00)] ~ 구룡치(13:43, 2.4km) ~ 내송마을(14:45, 2.5km) ~ 주천센터(15:05, 1.1km) 약 14.7km
- 고도 표 : 운봉 550m/ 주천 170m
- 방향 : 검정화살표(반시계 방향)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티스토리 블로그 <여행, 인생여정>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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