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4월 26일 울산경찰서 앞에서 항의 시위하는 울산 학생들
울산노동역사관
1960년 4월 19일 서울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발포한 총탄에 울산농림고 출신 한양대생 2학년 정임석이 복부 관통 총상을 입었다.
서울대병원에 후송된 정임석은 22일 의식을 찾아 울산 가족에게 연락했고, 정임석의 형 정반석은 야간 기차로 서울로 가 정임석을 지켰다. 하지만 25일 오전 8시 30분 정임석은 운명했다.
형은 울산에 정임석의 임종 소식을 알렸고, 4월 26일 열사의 모교 울산농림고(현 울산공고) 학생 150여 명이 등교 대신 울산교 앞에 모여 시내로 진출했다. 시내 중심을 거쳐 옛 울산경찰서(현 울산미술관)를 향할 때 울산고, 울산여고, 제일중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3천여 명이 됐다. 이들은 '부정선거 물러가라' '발포경찰 물러가라' 등 구호를 외쳤다.
분노한 시민들의 목소리에 경찰서장이 나와 사과한 뒤에도 학생들은 도심을 행진하며 독재정권에 부역한 기관에 항의했고, 옛 울산군청(현 동헌)에 도착해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울산군수가 시민들 앞에 나와 허리 숙여 사과했다. 이날 서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울산 학생들의 민주주의 행동은 26일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4월 27일 언양 중·고등학교 학생 1500명이 거리시위에 나서자, 언양지역 공무원들도 '반성하자'란 펼침막을 들고 사죄 행진을 했다. 당일 오후 정임석 열사의 유해가 울산역(구 학성역)에 도착할 때는 시민 1만여 명이 운집해 눈물로 유해를 맞이했다.
5월 3일엔 대규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농림고 학생 670명을 시작으로 울산고, 울산여고, 제일중, 울산중 학생과 시민 수천 명이 거리에 나서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사들의 즉각적인 퇴진을 촉구했다. 그 뒤로도 7월 29일 민의원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반혁명세력규탄투쟁위원회'를 꾸려 부정선거를 감시하고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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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저서로 <울산광역시 승격 백서> <한국수소연감>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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