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다른 얼굴', 바다보다 깊은 폭포를 만나다

화산기암 아래 쏟아지는 봄기운... 미련마저 사라지게 한 직소의 물줄기

등록 2026.04.18 15:43수정 2026.04.1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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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제주인가? ... 부안 바다 대신 마주한 이국적 풍경 ⓒ 최호림


전북 부안이라고 하면 대개 사람들은 바다를 먼저 떠올린다. 변산반도, 채석강, 격포항. 나 역시 그랬다. 으레 그래왔듯 바다를 보러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나는 부안에 가서 끝내 바다를 보지 못했다.

지난 18일,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다. 익숙한 바다 풍경 대신 다른 길을 걷고 싶었다. 그래서 차를 내변산 주차장에 세우고 직소폭포로 향했다. 검색창에는 "어렵지 않은 코스"라고 적혀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빠졌다. 단순한 피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호흡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때 문득 3년 전 기억이 스쳤다. 나를 쓰러뜨렸던 뇌경색. '설마 또…'라는 불안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잠시 멈춰야 할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갈림길에 선 마음이 발끝보다 무겁게 요동쳤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못한 건, 이 길이 주는 생경한 감각 때문이었다. 부안이 바닷가라는 편견을 내려놓자,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숲을 채우는 새소리가 비로소 또렷하게 들려왔다. 바닷길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마음을 건드렸고, 가쁜 숨과 달리 요동치던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등산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오르막은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게 했고, 호흡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시야가 탁 트였다. 그리고 마침내, 직소폭포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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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제주인가? ... 부안 바다 대신 마주한 이국적 풍경 ⓒ 최호림

직소폭포는 약 30m 높이에서 곧장 떨어지는 물줄기를 자랑하는 변산반도의 대표 비경이다. 폭포 아래 둥근 소(沼)에 물이 곧바로 떨어진다고 해서 '직소(直沼)'라는 이름이 붙었고, 예로부터 용이 살았다는 전설과 함께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로도 전해진다. 또한 이 일대는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암반 지형이 발달해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요란하기보다 묵직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쁘던 숨은 여전했지만, 나를 괴롭히던 불안은 이상하리만큼 잦아들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검은 화산기암과 폭포의 조화는, 내가 지금 부안이 아닌 제주에 와 있는 건 아닌지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풍경 앞에서, 사투 끝에 올라온 시간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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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제주인가?... 부안 바다 대신 마주한 이국적 풍경 ⓒ 최호림

기쁜 마음에 땀을 한 바가지 쏟으며 원암을 지나 하산길에 접어들 무렵,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원암은 직소폭포 탐방로 중간에 위치한 기암 지대로, 계곡과 암반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이룬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지점으로, 산행의 흐름을 이어주는 길목 같은 공간이다.

그 지점을 지나자 사람의 손길이 끊긴 듯한 낡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깨진 창문과 적막한 흉가의 분위기는 언제라도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묘한 긴장감을 주며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야간이었다면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날만큼은 '부안 바닷가에 왔으니 회'라는 공식을 깨뜨렸다. 산행을 한 사람으로서 도리처럼 파전과 찌개로 소박한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짧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루만 더 머물렀다면, 다음 날은 바다를 바라보며 회 한 접시를 곁들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뒤늦은 미련이었다.

하지만 바다가 아닌 폭포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쁜 호흡 끝에 마주한 그 묵직한 물줄기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이미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도, 갈매기도 보지 못했고 회 한 점도 먹지 못했지만, 그날 내가 마주한 부안의 또 다른 얼굴에는 이미 푸르른 봄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부안 #직소폭포 #변산반도 #전북여행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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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뇌경색이 찾아왔습니다. 재활병원 병상에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며 세상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투병 3년, 100편이 넘는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며 오늘도 사람과 삶, 희망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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