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 충북지부 조직도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작성한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 충북지부 간부 명단.
박만순
독촉국민회는 충북 지역에서도 만들어졌다. 독촉국민회 초대 지부장은 구연직이 맡았다. 사무실은 본정 3정목 청주읍사무소 내의 공회당에 두었다. 구연직의 뒤를 이어 이명구, 장응두가 지부장을 맡았다(최병주, <충북인사론>, 1955).
독촉국민회 강령은 "민족을 총단결해 민주주의 원칙하에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자주독립국가 촉진 완성을 기함"으로 되어 있다. 최근에 발굴된 자료에는 독촉국민회 충북지부의 임원 명단이 상세히 적시되어 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청주지방법원 검사국,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 1946).
회장 구연직(현 제일교회 목사) / 부회장: 최영준
총무부장: 장응두 / 재무부장: 허식 / 조직부장: 박서원 /
선전부장: 홍순복 / 문교부장: 김영수 / 산업부장: 김적구 /
후생부장: 김명목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독촉국민회의 지부장과 주요 간부의 이력이다. 초대 지부장 구연직은 1938년에 청주제일교회 목사로 부임한 이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충청노회지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충청북도 발기인, 조선예수교장로회가 개편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충청교구장으로 활동하였다. 제2대 지부장 이명구는 일제강점기 청주 지역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중추원 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을 지냈다. 반민족행위자였던 것이다.
또한 유념해야할 것은 독촉국민회 조직의 성격이다. 자신의 강령에 '민주주의 원칙하에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독촉국민회 회원들은 이러한 강령에 동의해 가입한 이들인가? 순수한 이념단체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번에 발굴된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청주지방법원 검사국,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 1946)에 의하면 독촉국민회 충북지부 회원은 30만 명이다. 1949년 당시 충청북도 인구는 114만 6509명이었다. 인구 2.6명 중 1명이 회원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 집에 최소 2명이 회원이라는 것이다.
과연 해방 후 남조선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독촉국민회에 적극적으로 가입했을까? 미군정과 경찰, 행정 조직이 총망라되어 성인 남성을 의무적으로 강제가입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독촉국민회는 순수한 정치단체가 아니라 반관(半官)단체였다.
독촉국민회의 활동 전위대는 청년단이 맡았다. 청주 박기운, 충주 김기철, 옥천 정구삼, 음성 이의상은 독촉국민회 지역 주요 간부이거나 청년단장을 맡았던 이들이다. 이들은 모두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충북지부 선전부장 홍순복의 형 홍순옥(1894년생)도 청원군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결론적으로 독촉국민회 주요 지도자는 1940~1950년대 지역 정계를 주도했다. 지역사회 유력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독촉국민회 산하 단체인 대한독립촉성부인회 역시 "본회는 건전한 민족정신을 함양하며 부녀자의 민도 향상을 주로 하야 강력한 국가건설을 도움으로써 목적함"을 강령으로 두고 있다. 이 단체 청주지부의 임원은 아래와 같다.
조윤순 회장, 한유정 부회장, 윤정례 총무부장, 박석근 조직부장, 김순종 선전부장이다. 회원은 2만 명이다. 1949년 당시 청주·청원 인구가 약 25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두 집에 한 명이 부인회 회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유정 부회장은 애국부인회 초대 회장 임순도의 뒤를 이어 회장을 맡기도 했다. 대한독립촉성부인회 역시 독촉국민회나 청년단(청년대)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이념단체가 아니라 반관 단체로 정치 지향적 인물들이 운집한 단체였다.
테러의 선봉
기존에 태극청년단으로 알려진 단체의 정확한 명칭은 태극청년동맹이다. 1946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태극청년동맹은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에 기한 국가의 건설을 기함.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기함"을 자신들의 강령으로 삼고 있다.
박기운 위원장은 후일 제헌의회 국회의원이 되고, 조수석 부회장은 1950년대 충북도의원에 당선된다. 홍정흠 선전부장은 제일교회 전도사이고, 이명하 후생부장은 유학생동맹 제2대 회장을 맡은 인물이다. 간부들의 구체적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박기운 / 부위원장: 조수석, 박성준
총무부장: 정규호 / 조직부장: 문철훈 / 선전부장: 홍정흠 /
조사부장: 김두기 / 재무부장: 신철우 / 문화부장: 박원규 /
후생부장: 이명하 / 반업부장: 성락언
회원은 1800명이다. 태극청년동맹은 활동지역이 청주에 국한되어 있는데, 조직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기존 자료에 전혀 언급된 적이 없던 단체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명기되어 있다. 건국청년동맹이 그것이다. "우리는 정의와 인격 향상을 위하여 수련하며 건국 대업에 공헌한다. 우리는 일상 자강 불식하며 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당을 지지 협력한다"를 강령으로 삼은 이 단체는 회원 수가 60명이다.

▲한국독립당 충북지부 조직도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작성한 한국독립당 충북지부 간부 명단.
박만순
위원장은 최동선, 부위원장은 서병돈, 총무부에는 신현우 외 2명, 교양부는 서병돈 외 1명, 선전부에는 김호헌 외 1명이 임원을 맡았다. 최동선은 1952년 실시된 제1회 충북도의회 선거에서 도의원에 당선되어, 초대 도의장을 맡게 된다. 1907년생인 서병돈은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청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아직 문화의 혜택을 입지 못한 우리 동포들로 하여금 대국민들에 착치되지 않도록 정도를 높여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하여 진력하도록 함으로써 취지로 함"을 목적으로 한 쇠고리동지회는 지식인 단체로 회원이 25명이었다. 1946년 당시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 미정 / 부회장: 이태희
총무부장: 이봉복 / 정무부장: 이상배 / 계몽부장: 오인택
1945년 10월 25일 창립한 쇠고리동지회(Iron Chain)는 벽보나 전단을 통하여 반탁·반공 홍보 활동에 주력한 단체이다. 최동찬의 증언에 의하면 회장은 김용식, 이재석, 이태희가 맡았다. 전만식, 이종찬, 김용식, 최동찬, 조수석, 김홍설, 이봉복, 오인탁, 이재석, 전종섭, 정태룡, 오택균, 최순용, 유명석, 신준식, 이봉하, 남궁찬, 유만형, 유길상, 홍이석이 회원이었다(건국청년운동협의회,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 1989 ; 최동찬 증언).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후 쇠고리동지회는 즉각 신탁통치 결사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연합국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는 한편 시가행진으로 신탁통치 반대 결의를 천명했다.
부강사건, 1·7 청주습격 사건, 옥천군 청산지서 습격 사건, 진천군 이월사건 등 수많은 사건에 테러단으로 참여했다. 즉 지식인 단체로 홍보 활동에 주력했다고 하지만 쇠고리동지회 역시 좌익 테러의 선봉대 역할을 맡았다. 태극청년동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계와 청년단, 그리고 노년층까지

▲충북정치 사회조직 현황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작성한 충북 정치사회조직 현황.
국사편찬위원회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전국민이 정치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기독청년과 노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본정 1정목(현재의 성안길) 제일교회 안에 있던 청주기독청년면려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조선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정치, 경제, 교육 기타 일반문화 기독적 건설을 목표로 실제 운동을 전개하기로 목적함"을 단체 구성의 목적으로 두었다. 회장 김춘성, 부회장 김명직, 총무 박종헌, 서기 홍청환, 회계 윤태복으로 회원은 104명이었다.
"자주독립의 한국인 정권을 지지함으로써 목적함. 윤리 및 도덕을 존숭할 것. 교육 및 산업을 권장할 것. 회원 상호 간 친목을 고하여 단결력을 공공케 할 것"을 목적으로 결성된 충북우국노인회는 회원이 130명이다.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 민영필 / 부회장: 한성교, 민영재, 신범휴
경리부장: 김상열 / 기획부장: 정운하 / 선전부장: 김세진
총무부장: 신경식 / 교화부장: 이봉선
이 단체의 특이 사항은 고문의 면면이다. 윤하영, 김성응, 윤홍식, 정순방, 이희준, 민영복, 김태희, 최재익, 김원근이 고문을 맡았다. 초대 충북도지사 윤하영, 제2대 국회의원 민영복(청주시), 대성학원 설립자 김원근(일제강점기 중추원참의 역임), 제3대 청주부윤 정순방(일제강점기 충북 영동·단양 군수 역임) 등 지역 사회 유명 인사가 총망라되었다. 청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단체를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정치의 과잉 시대였다.
한독당 vs. 한민당
해방 후 주요 우익단체 지도자는 정당으로 집결하였다. 김구 중심의 한독당과 이승만과 친일파 세력이 주도한 한민당이었다.
한독당은 "국가의 독립을 보위하여 민족의 문화를 앙양할 것. 계획경제 제도를 확립하여 균등사회의 행복 생활을 보장할 것. 전민정치기구를 건립하여서 민주공화의 국가체제를 완성할 것. 국◯교육시설을 정비하여 기본 지식과 필수기능"을 강령으로 삼았다. 회원(당원)은 50명이었고, 주요 간부는 다음과 같았다.
위원장: 서병돈 부위원장: 최익대 집감부장: 이주하 조직부장: 정시흥
선전부장: 지청식 재정부장: 박노철 훈련부장: 박성학 총무부장: 신완우
감찰위원장: 최유옥
"조선민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민주주의적 정체 수립을 기함.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을 강령으로 삼은 한민당 청주지부 회원(당원)은 200명이었다.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이희준 부위원장 최◯
집행위원 김동환 외 14명 감찰위원 김민중식 외 4명
총무부장·재무부장 허광 상무부장·정보부장 홍원길 조사부장 박노학
선전부장 김창기 조직부장·문교부장 민형식 외교부장 유영준
학생부장·연락부장 박기운 노동부장 민정식 군인부장 이춘옥
1945~1946년도에 청주에서는 한독당이 한민당의 우위에 있었다. 지역민들이 한민당을 '친일파의 소굴'로 인식했기 때문이다(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 지역 정치사회상, 2009). 하지만 1948년 제헌의회 선거를 전후해 한민당이 한독당의 우위에 섰다.
한민당 청주시당부 주요 간부는 국회와 지방정부·의회에 진출했다. 홍원길은 충북도의원과 초대 민선 청주시장(1960년도)에, 박기운은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창기는 후일 언론계에 몸담았다.
해방 후 우익 진영 정치·사회 단체와 정당은 반탁운동을 계기로 좌익 진영의 우위에 섰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한국전쟁은 좌익 진영을 완전히 거세했고, 우익 진영의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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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잡아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바꾼 충북 정치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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