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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6.04.25 16:01수정 2026.04.2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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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여기서 7시 40분에 버스 탔으니 천천히 와라. 길 미끄럽다. 천천히 와. 정류장에서 기다릴테니 천천히 와."
87세 어머님 전화다. 17일 금요일 오후부터 내린 비로 길이 미끄러울까 연신 천천히 오라고 당부하신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의 토요일 아침 여유에 방해가 될까 미안해하며 "정류장에서 기다릴테니 천천히 오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신다.
어머님은 농사일에 서툰 우리 부부가 밭을 인수한 이후 걱정이시다. 지난 아버님 제삿날 어머님은 지나가는 말로 "더덕이나 도라지를 심으면 손이 덜 가고 수월한데..." 하셨다. 더덕과 도라지는 심은 후 3년이 지나서 수확하면 되니까 그 기간 별도의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 농사짓기 수월한 작물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날 이후 어머님은 적당한 날을 보고 계셨던 듯하다. 그리고 이번 주말이 적기라고 판단하셨던 것.
갖가지 채소 모종을 사며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 종묘상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건만 종묘상 앞에는 채소 모종을 사기 위한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종묘상 주인 아주머니 목소리에도 생기가 넘쳤다. 우리 부부도 채소 모종 심을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일반 고추 4개, 아삭하고 맵지 않은 미인고추 2개, 방울토마토 3개, 미니 단호박 3개, 빨강 파프리카 2개, 오이 2개, 딸기 모종 3개, 망고 수박 2개, 복수박 2개를 샀다. 많이 심으면 나중에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조금씩 종류를 다양하게 구입했다. 가지 모종은 어머님이 가져 오셨다길래 따로 사지 않았다.

▲ 종묘상은 주말 아침인데도 채소 모종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도 채소 모종을 다양하게 구입했다. (맨 아래) 어머님이 직접 사오신 더덕 모종은 이처럼 여리고 부드럽게 생겼다. 3년 뒤에 이 여린 모종에서 어른 손가락만한 더덕 뿌리를 채취할 수 있다.
이정미
딸기, 수박, 단호박, 파프리카는 호기심에 심어보기로 했다. 우리는 모종을 적당한 땅에 옮겨 심고 거름으로 흙에 영양을 주는 것 외엔 전문적 관리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저 땅이, 바람이, 햇볕이, 비가,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맡길 것이다. 채소들이 자라는 모양을 지켜보고 기뻐할 것이다. 어느 순간 열매가 달리면 감탄하며 감사히 맛볼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튜브로 작물 기르는 것 보면, 엄청 뭐 많이 해. 그것 다 못해. 양파에도 특별한 영양제 같은 거 주고 하더라고."
"아, 그래야 양파 조직이 더 단단하고 치밀해지고 그런 건가?"
딸기 재배 영상도 찾아 보니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전용 영양제, 유기농 살충제 등 갖춰야 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원칙을 정했다. 지금처럼 흙에는 거름을 넣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농사일은 운이 좋아 잘 되는 해도 있을 것이고, 어느 해는 열매 하나 맛보지 못하기도 할 테다. 그래도 좋다. 우리가 시골에서 주말을 보내는 이유는, 애초에 자연의 섭리에 따르며 적정한 노동과 양질의 쉼이 공존하는 삶을 살고자 했으니까. 자연을 좀 더 자주 가까이하며, 내 손으로 채소를 길러 밥상에 올리는 소소한 기쁨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었으니. 도시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지역으로 삶의 공간을 확장해 더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뭐라도 더 주고 싶으신 어머니
"이거는 가자미고 이거는 조개 얼린 거. 이건 머위 장아찌. 이거는 조림해 먹고... 멍게는 살짝 데쳐서 먹으면 된다."
어머니의 장바구니 안에서는 끝도 없이 먹거리가 나온다. 가자미가 10마리는 되는 것 같다. 생선 조림을 해 먹을 수 있도록 따로 장만하여 얼린 생선이 한 뭉치, 얼린 바지락 알맹이 한통, 싱싱한 멍게알이 한 봉지, 건미역과 오이, 더덕 모종, 가지 모종.
그냥 오시는 못하는 어머님이시다. 87세 연세에 이 무거운 걸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오셨다. 오로지 아들 며느리 먹일 생각에 어머님은 힘든 내색도 없이 거뜬히 하신다.
삶은 고구마 하나를 드시고는 "고구마가 참 다네. 배가 든든하다" 하시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준비해 오신 일바지로 갈아 입으시고 일할 채비를 하셨다. 얼른 남편도 덩달아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따라 나섰다. 우리는 지난주에 미리 준비해 둔 채소 모종 심을 두둑으로 나갔다.

▲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하시며 종일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87세 나의 어머님 모습
이정미
어머니와 함께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종묘상에서 구입한 모종들을 옮겨 심었다. 남편과 어머니가 주거니 받거니 정을 나누는 사이 나는 점심을 준비했다. 어머님이 가져오신 가자미를 굽고 멍게알도 살짝 데쳤다. 상추를 따고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야채 듬뿍 카레를 보글보글 끓였다. 농막 이웃 언니가 준 묵은지도 곁들였다.
"응, 카레, 나는 카레가 참 맛있다."
어머님은 브로콜리, 양파, 표고버섯, 당근을 넣어 만든 따끈한 카레를 맛있게 드셨다. 잘 드시니 마음이 좋았다. 어머님은 점심을 드신 후에도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셨다. 느루뜰 이곳 저곳을 둘러보시며 풀도 뽑고 빽빽하게 난 봄상추를 솎아내고 부추를 베어 다듬으셨다.
꽃대가 올라온 시금치 두둑에서 보드라운 것만 골라 따셨다. "시금치는 꽃대가 쑥 올라오도록 두면 된다. 꽃 피고 씨 받으면 된다"고 일러두셨다. 농막 이웃 언니 고사리 밭에서 고사리도 한 바구니 따셨다. "이대로 두면 쇠어서 못먹어" 하시며 아까워 하셨다.
'이토록 강인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주고도 주고도 마르지 않는 저 사랑의 원천은 무엇일까?'
'채소 한 잎까지도 소중히 하고, 아끼는 마음이 어쩌면 저토록 한결같을까?'
하나라도 더 도와주시려고, 몸이 불편하실텐데도 부지런히 움직이시고, 불평하지 않으시고, 바라지도 않으시는 어머님이시다. 나는 간혹 어머님과 같은 '우리의 어머니 세대'를 생각할 때면 "같은 여성으로서 내가 다 억울하다"며 목소리에 힘을 주곤 했다.
"연약한 여성이건만, 그 숱한 질곡의 세월을 어떻게 살아내셨는지, 우리 어머니들이 참 많이 고생하셨다"고 죄 없는 남편에게 그 아픔과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우리 어머님의 삶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건만, 오십 고개 중턱을 넘고 있는 자식에게 더 못해줘서 미안해 하시니 어머니 사랑은 가없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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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고 오신 87세 시어머니 장바구니에서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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