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듣기
  • 보름 넘게 오지 않던 단골 손님, 콜라 할머니

    [빌라촌 편의점 이야기] 재개발 이슈와 전혀 무관한 독거노인의 삶

    등록 2026.04.21 08:32수정 2026.04.21 09:02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재개발 바람이 부는 서울의 전형적인 서민 동네에서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며 만나는 신산하기도, 따뜻하기도 한 이야기들을 전합니다.[기자말]
    아내가 집 앞에 편의점을 연 뒤로 자주 가게에서 시간을 보낸다. 유명 프랜차이즈의 간판을 달고는 있지만, 세련된 도시의 편의점이라기보다 동네 별별 사람들이 별별 이야기를 다 털어놓거나 푸념을 늘어놓는 고해성사 하는 곳 비슷하다. 통유리창 너머로 낡은 빌라들을 보고 있으면, 그곳에 뿌리 내린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보인다.

    "아까 내가 여기서 변비약 샀쥬?"


    어느 토요일 오후, 바랜 꽃무늬 카디건을 걸친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시며 물으신다. 포스기 화면을 살피다 고개를 들고는,

    "아뇨, 어머님. 변비약이면 아마 저 밑에 약국에서 사셨을 거예요. 저희 같은 편의점엔 그런 약 안 팔아요."

    할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냉장고 쪽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셨다. 그러더니 익숙한 손길로 콜라 한 병을 집어 들고 다시 카운터로 오셨다.

    "그럼 아까 내가 여기서 콜라 샀었나?"
    "아뇨, 오늘은 여기 처음 오신 거예요."
    "그럼 내가 어디서 샀지? 아까 분명히 샀는데. 그럼 다른 집인가? 내가 여기서 안 산 거 확실하쥬? 이상하네..."

    할머니는콜라를 손에 쥐고 멍하니 밖을 내다보셨다. 이 할머니가 누구인지는 안다. 가게를 열고 처음 우리 편의점에 오셔서 "여기 주인이 바뀌었슈?" 하고 물으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똑같이 물으셔서 아하, 치매기가 조금 있으시구나 싶었다. 하지만 계산도 정확히 하시고, 인근 시장에서 장도 야무지게 보셔서 들고 오시는 걸 보면 일상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닌 듯했다.


    이후 할머니는 거의 매일 들러 콜라나 심심풀이 과자를 하나씩 사 가신다. 당분이 많다고 며느리가 콜라를 못 마시게 하는데, 그래도 이게 젤 속이 시원해, 하신다. 당분이 몸에 나쁠 것 같아 제로콜라를 권해드린 적이 있는데, "이게 정말 설탕이 없는 거유? 그래도 달달하네?" 하며 신기해 하셨다.

     할머니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콜라.
    ▲ 할머니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콜라. jay_5 on Unsplash

    하지만 며느리가 제로콜라가 몸에 더 좋은 건 아니라고 했다며 다시 빨간 뚜껑의 일반 콜라를 찾으셨다. 나는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어떤 콜라든 그저 늘 속이 거북하다는 할머니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기만 하면 될 것 같았으니까.


    할머니는 언제나 콜라 한 병을 다 비우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으신다. 늘 혼자 다니시고, 편의점 옆 어르신들 놀이터인 소공원에서도 어울리는 걸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습관 때문에 친구가 없으신 게 아닌가 싶었다.

    하여, 말끝마다 "아이고 그러셨구나!" 추임새를 넣어드리면 아이처럼 좋아하신다. 이야기는 늘 같다. 며느리가 전화로 잔소리만 하지 와 보지는 않으면서, 동네 재개발 한다니 집 팔지 말라 성화라고.

    "이까짓 오래된 집이 몇 푼이나 한다고..."

    할머니는 혀를 찼지만, 그 말에 오지랖 넓게 한 마디를 얹었다.

    "그래도 할머니, 팔지 말고 꼭꼭 움켜쥐고 계세요."

    사실 '이까짓 게'가 아니다. 지금 이 동네는 재개발 소문에 돈바람이 불어 야단이다. 개발 좋아하는 시장과 정치인, 그리고 개발을 부추기는 건축 회사 직원들이 뻔질나게 드나들고, 동네 사람들은 우리 편의점에 와서 푸념인지 의견인지 한 마디씩 늘어놓는다.

    이른바 재개발 찬성파와 반대파, 그리고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몰라파로 나뉜다. 그중 할머니에 속하겠다. 오래전 집을 살 때 오천만 원을 줬는데, 부동산쟁이가 삼십 억은 받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란다.

    "그게 말이나 돼유? 미친눔이지.이게 집이지 금덩어리여?"

    할머니는 기가찬 듯 웃으셨지만, 그 미친 소리가 현실인 동네다. 삼십 억이라는 숫자가 할머니의 낡은 지붕 위를 떠다녔지만, 정작 주인인 할머니는 그 숫자의 무게를 전혀 몰랐다. 아니,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 '콜라 할머니'가 보름이 넘도록 오지 않으신다. 아내와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아들네가 멀리 있어 혼자 사신다던데, 댁이 어딘지나 알아둘 걸.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했다. 동네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골목에는 건설사들이 내건 '재개발 환영' 현수막이 어지럽고 일전에 열린 설명회에서는 보상금 문제로 주민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물론 그 자리에 할머니의 모습은 없었다. 돈 난리에 혹시 자식들과 다툼이 있었을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동네는 어수선해도 계절은 어김없이 제 할 일을 한다. 꽃울 피우고 또 떨구고 바람을 이리로 불었다 다시 저리로 분다. 조용한 오후 넋을 놓고 편의점 창 밖을 바라보는데, "딸랑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들어오신다.

    "아까 내가 여기서 변비약 샀쥬?"
    #할머니 #재개발 #콜라 #빌라 #현수막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방송작가, DJ, 라디오와 TV PD 로 방송현장에서 일했습니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신입 환경미화원 월급 580만 원...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신입 환경미화원 월급 580만 원...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2. 2 '유해진 북한상'이 표현의 자유라면 1923년 '조센징상'은? '유해진 북한상'이 표현의 자유라면 1923년 '조센징상'은?
    3. 3 한국 아파트가 무너지기 쉬운 이유... 충격적인 국토부 문서 한국 아파트가 무너지기 쉬운 이유... 충격적인 국토부 문서
    4. 4 이 대통령님, '대국민 사기극'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대통령님, '대국민 사기극'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5. 5 금메달 들고 웃으며 "군대 안 간다"는 선수들 욕하기 전에 금메달 들고 웃으며 "군대 안 간다"는 선수들 욕하기 전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