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4.21 08:40수정 2026.04.2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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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만든 조용한 독서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일반적인 독서 토론 모임이 아닙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 그저 조용히 읽다 헤어지는 모임입니다. '사일런트 리딩'이라 부르는 이런 행사는 제가 사는 베를린에서도 몇 년 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고풍스러운 보데 박물관(Bode Museum) 카페에서 열리는 모임이 대표적이지요. 하지만 베를린 거주 한국인을 위한 조용한 독서 모임은 제가 알기로는 지인의 행사가 유일합니다.
늘 에너지 넘치는 지인은 손도 큽니다. 본인 사업장을 장소로 선뜻 내어주고 커피와 다과까지 무료로 준비하니까요. 그러면 참석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춰 소소한 간식 거리를 들고 나타납니다. 초콜릿, 직접 만든 약밥, 과자 등을 주섬주섬 테이블에 올려두다 보면, 어색했던 공기는 어느새 뭉근하고 따듯하게 풀립니다. 나이, 성별, 관심사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순수하게 책을 읽으려고 한곳에 모입니다.
집에서 뒹굴며 세상 편하게 읽으면 그만인 책을 왜 모여서 읽을까요? 내향인을 위한 '묵언 수행 파티' 느낌일까요? 아니면 독일어와 독일 사람 틈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가끔은 이렇게 최소한의 에너지만 써도 되는 모임에서 위로와 영감을 얻는 걸까요? 그도 아니면, 성향 막론하고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일까요?
결론은 '모두 맞다'입니다. 저만해도 아이 학교 학부모 모임이나 독일 지인 생일 파티에 가면 대화 소재가 금방 바닥나고 뻘쭘하기 일쑤입니다. 한국에서도 내향인이나 외국인이면 사람 많이 모인 행사에서 어색해 하듯이요.
하지만 얼추 두 달에 한 번 토요일에 열리는 이 조용한 독서 모임 날이면, 집 나설 때부터 마음이 가볍습니다. 책 한 권, 간식 하나 챙겨 편하게 갔다 오면 됩니다. 자기소개 압박도, 다 못 읽어 간 토론 지정 도서의 부담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 일상은 내키지 않는 일(생업), 꼭 해야 할 일(가사 노동), 불편하지만 만나야 할 사람(생업, 육아 관련, 사교모임) 투성이입니다. 한독 커플인 저는 남편이 꼭 가자는 모임에 나갔다가도, 어떻게든 핑계 대며 일찍 빠져나올 궁리를 하곤 합니다.
혼자 가라고 해도 굳이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남편의 마음이 기특해 가끔 유혹에 넘어가지만, 시끌벅적한 수다 속에서 어느새 말없이 앉아 있노라면 민망함에 시계만 자꾸 보게됩니다. 반대 상황도 있긴 했습니다. 한국 여행 중 해운대에서 어릴 적 친구들에게 남편을 소개했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영어 섞어가며 남편을 배려하고 어느 정도 소통이 됐지만,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금세 한국말로만(정확히는 부산말) 열띤 수다를 떨며 2차, 3차 자리를 옮겨 놀았더랬죠. 술로 시간을 때우다 지친 남편은 숙소로 돌아가자고 졸랐고,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은 저는 그런 남편이 얄미웠죠. 요즘도 해운대 일을 언급하면 남편은 "자기가 언제 그랬냐"며 너스레를 떨곤 합니다.
이제 저도 중년이 됐고, 편한 자리, 편한 사람들 위주로 모임을 늘리고 싶습니다. 에너지 덜 쓰는 모임 말입니다. 말주변 없는 사람도 혼자 있는 건 싫어하는 법이니까요. 혼자 하는 독서지만, 사람 온기 충만하고 소소한 책 얘기 나누는 이 '느슨한' 모임에서 저는 활력과 안정을 얻습니다.

▲조용한 독서 모임 다과 4월 18일 토요일 베를린 슈테글리츠 지역에서 열린 '조용한 독서'모임에 총 8명이 모였습니다.
백관숙
약 1시간 반 조용한 독서가 메인 메뉴라면, 앞뒤 30분씩은 오늘 가져온 책이나 앞으로 읽을 책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전식과 후식' 같은 시간입니다. 자연스레 한글 종이책 구경도 하고, "아, 저도 그 책 읽고 싶었어요!"라고 맞장구치며 귀동냥도 합니다.
사실 베를린은 다른 독일 도시에 비해 한국 종이책을 구하기 쉽습니다. 한국 문화원 도서관, 자유대 한국학과 도서관(외부인 관외 대출은 불가, 관내 열람 가능), 한글학교 도서관, 페이스북 중고 거래 등이 활발해서 다양한 한국 종이책을 사거나 빌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조용한 독서' 모임까지 더해지니 책 좋아하는 한인에게 고마운 환경이긴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모임 참석자 과반이 종교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베를린은 한인 교회와 성당이 워낙 잘 되어 있어 마음 둘 곳을 찾기 쉬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종교 밖의 느슨한 공동체를 원하는 이들이 이곳으로 모이는 듯합니다.
앞으로는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해 회비나 기부금도 고려 중입니다. 도심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가격 정도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최자 혼자 장소 제공과 다과를 도맡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책은 좋아하지만 모임 울렁증 있는 '내향 애서가'들에게 이 모임이 오래도록 따뜻한 안식처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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