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4.22 11:51수정 2026.04.2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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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트 모양의 연둣빛 잎사귀 뒤로 연보라색 라일락 꽃송이가 활짝 피어났다.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다.
전갑남
지난해 여름, 아랫집에서 건네받은 라일락 묘목은 내 손에 들릴 때부터 어딘가 미덥지 않았다. 뿌리 근처 흙이 많이 떨어져 나가던 순간, 이미 절반 쯤 잃은 생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구덩이를 넉넉히 파고 고운 흙을 채워 넣으며, 나름의 예의를 다해 심었다. 가지도 조금 쳐냈다. 살기 위해 덜어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듯이.
그 뒤로 한동안, 라일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잎이 시들지도, 새로 나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침묵. 어쩌다 가물면 물을 주기는 했지만, 비료를 챙기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를 거둔 쪽에 가까웠다. 생명이라기보다, 이미 지나간 무엇의 흔적처럼 여겼다.
겨울이 오자, 라일락은 끝내 모든 잎을 떨구고 말았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그 모습은 오히려 단정했다. 포기한 듯하면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상태.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 나무를 거의 잊고 지냈다.
반신반의하며 본 나무, 꽃을 피워냈다

▲ 아내가 꽃향기를 맡아본다. "어쩜 이리 향기로울까?"라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전갑남
봄이 왔다. 옆에 심어둔 앵두나무에 먼저 꽃망울이 맺혔다. 아내가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여보, 여보. 라일락 꽃 피려나 봐?"
나는 반신반의하며 라일락을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보였다. 가지 곳곳에 맺힌 단단한 눈들. 잎눈인지 꽃눈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분명 살아 있는 움직임이었다. 겨우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서 있던 그 나무가, 실은 안에서 조용히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와, 고 녀석 살아 있었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딘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겉으로 드러난 기척만으로 생을 판단해왔던 것이다.
라일락은 그 뒤로 서두르지 않았다. 다른 봄꽃들이 앞다투어 피고 지는 동안에도 자기 속도를 지켰다. 잎을 먼저 내고, 햇빛을 받아들이고, 바람을 익힌 뒤에야 비로소 꽃을 피워냈다. 그 꽃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오래 기다린 만큼 단단한 향을 품고 있었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지만, 한 번 맡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향이었다.
그 향은 실처럼 공기 중에 감겨 있다. 보라색 꽃송이가 뭉쳐 피어날수록 색보다 먼저 마음을 건드리는 은은함은 기분 좋은 향기이다. 그윽한 향기에 이끌려 나무 곁을 서성이다가, 옆에서 함께 꽃을 보던 아내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당신, 라일락 원래 이름이 뭔지 알아?"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꽃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답했다.
깊고 그윽한 향기

▲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연보랏빛 라일락 꽃잎 위로, 아직 터지지 않은 진분홍색 꽃망울들이 탐스럽게 맺혀 봄의 싱그러움을 더한다.
전갑남
"그걸 모를 줄 알고? 나 알지, 미스킴 라일락!"
아내의 말처럼, 이 나무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미스킴 라일락(Miss Kim Lilac)'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수수꽃다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이 나무의 뒤편에는, 오래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미국 식물 채집가 엘윈 미더(Elwin M. Meader)는 북한산 바위틈에서 자생하던 털개회나무 종자를 채집해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는 이 종자를 개량하여 향기는 더욱 짙고 추위에 강한 품종을 길러냈고, 당시 곁에서 업무를 돕던 한국인 조력자의 성을 따 '미스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 산야의 수수꽃다리가 먼 타국으로 건너가 낯선 이름을 입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척박한 바위 틈에서도 기어이 꽃을 피워내던 그 강인한 유전자가 우리 마당의 어린 묘목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일까. 미스킴 라일락은 꽃망울을 맺을 때는 짙은 보라색을 띠지만, 활짝 피면 맑은 라벤더색으로 옅어지고, 질 무렵에는 거의 흰빛에 가까워진다. 마치 한 생애의 변화를 짧은 개화기 안에 응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아직 어린 나무이지만, 그 향기는 깊고 그윽하다. 이름은 타국에서 붙여졌으나, 그 뿌리와 향기만큼은 여전히 우리 산야의 매운 바람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겉모습이 미덥지 않다고, 기척이 없다고 생을 가벼이 여겼던 나의 조급함이 수수꽃다리의 깊은 향기 앞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보이지 않는 향기가 담장을 넘듯, 이 나무의 이야기도 내 마음의 담장을 넘어 오래 머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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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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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가지만 남았던 나무의 보라빛 그윽한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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