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군(IDF) 병사가 레바논 남부 작전 도중 예수 그리스도 상의 머리 부분을 파괴하고 있는 장면이 19일 소셜미디어에 확산됐다. <이스라엘타임스> 등 현지 언론은 이스라엘군이 실제 사진임을 인정하고 조취를 취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X계정(@ytirawi)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방위군 병사가 벌인 것으로 알려진 예수상 훼손 사건은 하나의 일탈로 넘기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상징은 빠르게 복구되고 가해자는 즉각 처벌되지만, 그보다 훨씬 큰 규모의 폭력과 파괴는 왜 반복되는가. 무엇은 문제로 인식되고, 무엇은 묵인되는가. 이 간극은 우연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끄는 현재의 정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정의와 전쟁이 일상화된 구조를 함께 목격하고 있다. 이 글은 하나의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상징의 파괴 뒤에 숨겨진 권력의 논리, 전쟁을 정치로 활용하는 위험성, 그리고 그 속에서 점차 무너져가는 인간성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상징을 파괴하는 권력의 오만
이번 사건은 군 기강 해이로 축소될 수 없다. 한 병사가 망치로 예수상을 내려치고, 또 다른 병사가 이를 촬영했다는 사실은 이 행위가 개인의 충동을 넘어 집단적 분위기 속에서 가능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폭력은 혼자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묵인과 방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동조 속에서 자라난다.
예수상은 신앙과 존엄을 상징한다. 그 상징을 파괴하는 행위는 특정 종교를 겨냥한 공격을 넘어,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폭력이다. 이러한 파괴는 물리적 훼손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을 대상화하고, 그 존엄을 가볍게 취급하는 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스라엘 군이 이 사건에 신속히 징계를 내린 점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왜 이 사건에는 즉각 대응했는가. 왜 공습으로 무너진 삶과 공동체에 대해서는 같은 속도의 책임이 따르지 않는가. 동상의 훼손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인간의 죽음과 고통에는 둔감한 이 태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권력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후순위에 두는지 보여주는 기준이다.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사건에는 빠르게 대응하고, 반복되는 구조적 폭력은 '일상'으로 처리한다. 이 선택은 정치적 계산이며 권력의 판단이다.
그 중심에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있다. 그는 국제적 비난을 관리하는 데 능숙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지속되는 군사적 긴장과 폭력의 구조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구성원들은 '보이는 문제'만이 문제이며, 보이지 않는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는 왜곡된 기준을 내면화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도덕적 감수성은 마비되고, 폭력은 쉽게 정당화된다. 이 사건은 종교적 균형에도 균열을 낸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레바논에서 특정 신앙의 상징을 파괴하는 행위는 공동체 간 신뢰를 흔든다. 이는 이미 긴장된 지역에 새로운 갈등의 불씨를 던진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상징인가, 인간인가. 상징에는 민감하고 인간의 고통에는 둔감한 권력은 이미 본질을 잃었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오만뿐이다.
전쟁을 정치로 삼는 지도자의 위험성
전쟁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 전쟁이 의도적으로 유지되고 정치적 도구로 활용될 때, 비극은 구조가 된다. 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치에서 우리는 이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안보'를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해왔고, 그 안보는 점점 더 공격적인 군사 전략과 결합되어 왔다.
이 안보는 불안을 해소하기보다 확대한다. 외부의 위협을 강조하고 긴장을 고조시키며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를 피로하게 만들고 갈등을 구조화한다. 사람들은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평화는 점점 더 멀어진다.
레바논과의 휴전 과정에서도 공습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이 정치의 본질을 드러낸다. 휴전은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그것이 전술로 활용되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상대와 국제사회 모두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민간인이다. 군사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공격은 일상의 붕괴로 이어진다. 집이 무너지고 가족이 흩어지며 삶의 기반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고통은 '부수적 피해'라는 말로 축소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폭력이 일상으로 굳어진다는 점이다. 반복되는 충돌 속에서 사람들은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무감각을 낳는다. 죽음과 파괴는 더 이상 충격이 아니라 배경이 된다. 그 자리에는 냉소와 체념이 들어선다. 이러한 정치 방식은 내부 민주주의에도 균열을 낸다. 외부 위협이 강조될수록 내부 비판은 억제된다.
안보를 이유로 한 통제는 강화되고, 다른 목소리는 배제된다. 사회는 하나의 서사에 의해 지배되고, 질문은 위험한 행위가 된다. 전쟁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는 지도자는 외부 갈등을 확대할 뿐 아니라 내부 기반도 약화시킨다. 도덕적 기준은 낮아지고, 사회는 장기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상을 입는다.
지도자는 두려움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을 넘어설 길을 제시할 것인가. 이 선택에 따라 사회의 방향은 결정된다. 전쟁이 정치가 되는 순간, 인간은 수단이 되고 평화는 구호가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인간의 존엄은 조용히 사라진다.
선택적 정의와 위선의 정치
정의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그러나 권력은 종종 정의를 도구로 사용한다. 필요할 때 내세우고, 불리할 때는 외면한다. 그 순간 정의는 통치의 기술로 변한다.
예수상 훼손 사건에 대한 신속한 징계는 원칙이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구조적 폭력에 대한 대응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분명하다. 상징의 훼손에는 즉각 반응하면서, 반복되는 민간인 피해에는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이 이중성은 전략이다. 비난을 피해야 할 사건에는 빠르게 대응해 이미지를 관리하고, 구조적 폭력은 '안보'로 정당화한다. 이 과정에서 정의는 선택적으로 적용된다. 베냐민 네타냐후의 통치는 이러한 방식과 맞닿아 있다. 외부 시선을 관리하면서 내부에서는 강경 노선을 유지한다.
이 이중 구조는 권력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신뢰를 무너뜨린다. 정의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시민은 냉소를 배운다. 법과 제도가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공공의 가치는 약화된다. 이는 정치 문제를 넘어 사회의 윤리적 기반을 흔든다.
국제사회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강한 국가는 자신에게 유리한 기준을 적용하고, 약한 국가는 그 기준의 피해자가 된다. 규범은 약해지고 힘이 질서를 대신한다. 특히 중동과 같은 긴장된 지역에서는 이 불균형이 더 위험하다. 공정성과 일관성이 무너질수록 불신은 깊어지고 갈등은 증폭된다. 평화의 기반은 약해진다.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가장 약한 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때 그것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강한 자는 선택권을 넓히고, 약한 자는 희생을 떠안는다. 이 구조 속에서 정의는 멀어지고 위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선택적 정의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기준을 결정하는 문제다. 그 기준이 무너질 때,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토대를 잃는다.
인간성의 회복 없이는 평화도 없다
문제의 핵심은 정치나 군사 충돌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성의 상실이다. 전쟁이 반복되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타인을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름과 삶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처리해야 할 요소로 인식한다.
이 변화는 천천히 진행되지만 확실하다. 처음에는 충격이었던 장면이 점차 익숙해지고, 결국 아무 감정도 남지 않는다. 고통은 숫자가 되고 죽음은 통계가 된다. 그 과정에서 공감이 사라진다. 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치가 문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정책은 이러한 비인간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해 왔다. 안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타자의 고통은 뒤로 밀려난다.
국가가 자국민의 안전을 우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정당성을 잃는다. 타인의 불안을 기반으로 한 안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평화는 총성이 멈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관계다. 상대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한, 어떤 합의도 오래가지 못한다. 예수상 훼손 사건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타자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이미 깊은 수준의 비인간화를 보여준다. 이런 태도가 확산될수록 사회는 거칠어지고 갈등은 격화된다.
필요한 것은 정책 이전에 인간성의 회복이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 서로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선, 폭력을 거부하는 태도.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 한 평화는 유지될 수 없다. 이 과제는 지도자만의 책임이 아니다. 시민사회와 국제사회도 같은 책임을 지닌다. 침묵은 동조가 되고, 무관심은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인간성을 회복할 것인가, 계속 잃어버릴 것인가. 이 선택은 작은 태도와 판단의 축적 속에서 이루어진다. 묻는다. 권력을 지키는 일과 인간을 지키는 일 가운데 무엇이 우선인가. 인간을 배제한 권력은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 평화는 힘이 아니라 이해와 존중 위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분명하다. 타인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