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가 덕을 쌓았나 봐요"... 서해 끝 섬 격렬비열도를 밟다

입도 성공률 다섯 번에 한 번, 특정도서 제125호 북격렬비열도

등록 2026.04.23 10:11수정 2026.04.2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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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비열도 등대 앞에서 참가자 28명의 기념촬영 현수막에는 '생태 가치 확인 및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적 연대 탐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격렬비열도사랑운동본부·국립공원·지역사회 이해관계자들이 함께한 올해 첫 공식 입도였다.
▲격렬비열도 등대 앞에서 참가자 28명의 기념촬영 현수막에는 '생태 가치 확인 및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적 연대 탐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격렬비열도사랑운동본부·국립공원·지역사회 이해관계자들이 함께한 올해 첫 공식 입도였다. (사)격렬비열도사랑운동본부

(사)격렬비열도사랑운동본부는 22일, 격렬비열도 탐방을 통한 지역 교류·발전 사업의 일환으로 무등산국립공원 관계자, 종교계, 지역 리더 등 28명과 함께 올해 첫 입도 탐방을 진행했다. 충남 최서단 영토의 생태 가치를 직접 확인하고, 섬 자원 관리 현황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신진항 출발 오전 10시 30분, 기타어선 1척. 필자도 그 배에 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전날 밤 3시간밖에 못 잤다. 격렬비열도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새벽 내내 뒤척였다. 입도 성공률이 다섯 번에 한 번이라던데, 배 안에서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 팀은 5대가 덕을 쌓았나 봐요."

웃음이 터졌다.

 귀항하는 배 위에서 바라본 격렬비열도 전경. 파란 하늘 아래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의 하얀 등대와 통신 시설들이 오늘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귀항하는 배 위에서 바라본 격렬비열도 전경. 파란 하늘 아래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의 하얀 등대와 통신 시설들이 오늘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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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렬비열도 ⓒ 최미향


서해의 독도, 격렬비열도

격렬비열도는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신진항에서 뱃길로 70km 떨어진 곳에 있다. 북·동·서격렬비도 3개 섬과 9개 부속도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격렬비도는 우리나라 영해기점 23개 도서 중 하나로 중국 산둥반도까지 268km 거리다.

이 바다에서 우리나라 수산물의 약 20%가 생산되고, 해양생물만 590여 종이 서식한다. 북격렬비도는 국유지(해양수산부)지만, 동·서격렬비도는 개인 사유지로 남아 있다. 7천만 년 전 해저 화산 폭발로 태어난 이 섬은, 동해에 독도가 있다면 서해에는 격렬비열도가 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신진항을 벗어나 격렬비열도로 향하는 뱃길에서 마주친 병풍도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바다 위에 홀로 솟아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붓으로는 흉내 내기 어려울 풍경이었다.
▲신진항을 벗어나 격렬비열도로 향하는 뱃길에서 마주친 병풍도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바다 위에 홀로 솟아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붓으로는 흉내 내기 어려울 풍경이었다. 최미향

신진항을 벗어나자 섬들이 쏟아졌다. 궁시도, 란도, 병풍도... 이름 그대로 병풍처럼 솟아오른 섬 앞을 지나칠 때는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붓으로는 흉내 내기 어려울 풍경이었다. 자연이 수천만 년에 걸쳐 빚어낸 작품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서해에 이렇게 많은 섬이 있다는 것을, 육지에서는 미처 몰랐다. 배는 그 섬들을 하나씩 뒤로 밀며 서쪽으로 달렸다.

격렬비열도 암벽 위에 갈매기들 옹기종기 앉아 사람보다 먼저, 사람보다 오래 이 섬을 지켜온 진짜 주인들이다.
▲격렬비열도 암벽 위에 갈매기들 옹기종기 앉아 사람보다 먼저, 사람보다 오래 이 섬을 지켜온 진짜 주인들이다. 최미향

갈매기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섬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배에서는 추웠는데, 발을 디디자 따사로운 햇살이 맞아줬다. 그리고 냄새가 먼저 일행을 반겨주었다. 갈매기 소리와 함께, 새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특유의 향이 섬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 여기는 사람의 섬이 아니구나.

(왼쪽) 붉은 꽃을 머금은 채 지려 하는 동백숲, (오른쪽) 노랗게 만발한 유채꽃 모두 새들이 씨앗을 물어다 심은 것들이다. 사람 손 하나 닿지 않은 이 섬에서 자연은 스스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왼쪽) 붉은 꽃을 머금은 채 지려 하는 동백숲, (오른쪽) 노랗게 만발한 유채꽃 모두 새들이 씨앗을 물어다 심은 것들이다. 사람 손 하나 닿지 않은 이 섬에서 자연은 스스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최미향

바람 한 점 없는 깔끔한 봄 날씨에 하늘마저 쨍해서 윤슬이 기가 막혔다. 동백꽃은 지려 하고, 그 옆을 지키는 유채꽃이 만발했다. 파도가 숨을 죽이는 자리에 갈매기들이 곡예비행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배에서 내리자 새들이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주시했다. 동백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달래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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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렬비열도 ⓒ 최미향


알고 보니 이 꽃들은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니었다. 유채도, 동백도, 달래도 모두 새들이 물어다 심은 것이라 했다. 씨앗을 품은 채 날아온 새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 섬을 꽃밭으로 만들었다. 새들이 심고, 새들이 가꾸고, 새들이 지키는 섬이었다.

갈매기들은 유난히 싱그럽고 튼실했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청정한 바다에서 자란 덕분일 것이다. 날갯짓 하나하나가 힘차고 곡예비행 솜씨도 기가 막혔다. 저 새들에게 이 섬은 지상의 낙원이었다.

 유채꽃이 흐드러진 언덕 위, 검은 화강암에 새겨진 '격렬비열도'라는 다섯 글자
▲ 유채꽃이 흐드러진 언덕 위, 검은 화강암에 새겨진 '격렬비열도'라는 다섯 글자 최미향

생물·자원 채취 금지, 이유가 있었다

섬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표지판이었다. '특정도서 제125호 북격렬비열도'. 위반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다. 북격렬비도는 2002년, 동·서격렬비도는 2016년 특정도서로 지정됐다. 소규모 폐쇄형 생태계라 조금의 외부 간섭에도 훼손될 수 있고, 한 번 망가지면 원상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유채꽃 너머, 검은 화강암 비석에 새겨진 '격렬비열도' 네 글자가 서해 하늘 아래 묵직하게 서 있었다.

배 위에서 나눠받은 책 한 권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이 펴낸 자료집이었다. 이 섬 인근에만 해양생물 590여 종이 서식하고, 서해 고유종인 황해볼락, 멸종위기종 장수삿갓조개, 파래가리비가 살아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해양선형동물 신종까지 발견됐다고 했다. 숫자만으로도 이 바다가 얼마나 살아있는 곳인지 실감이 났다.

격렬비열도 등대 구역에서 관계자 섬의 운영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격렬비열도 등대 구역에서 관계자 섬의 운영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최미향

빗물로 버티는 사람들

북격렬비도 등대 구역에 올라섰다. 하얀 등대가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이곳을 지키는 직원은 단 4명, 15일씩 교대로 근무한다고 했다. 등대원이 직접 설명했다.

"여기는 비가 와야만 생활용수를 쓸 수 있습니다. 지금도 생수를 쓰고 있어요. 겨울철에 흐린 날이 많아 태양광만으로는 전기가 부족할 때는 발전기를 가동해서 축전지에 충전해서 씁니다. 1909년에 처음 점등됐고, 1994년에 무인화됐다가 2015년에 다시 유인화됐습니다. 다른 기관들도 상주하기로 했는데, 힘이 없는지 저희만 먼저 들어오게 됐네요."

누군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젊은 분들한테는 유배지겠지만, 50대 넘어서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겠네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빗물로, 태양광으로, 발전기로 버티며 서해 끝을 지키는 삶. 누군가에게는 형벌 같은 고독이, 누군가에게는 생애 최고의 사치일 수 있었다.

전 가톨릭대 서종철 지질학과 교수 격렬비열도의 지질학적 특성과 지정학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전 가톨릭대 서종철 지질학과 교수 격렬비열도의 지질학적 특성과 지정학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최미향

점심을 마친 뒤, 이날 함께한 전 가톨릭대 서종철 지질학과 교수가 자리에서 설명을 이어갔다.

"서해는 제일 깊은 데가 90m가 안 됩니다. 아파트 15층이 약 40m예요. 이 앞바다 수심이 40m니까, 아파트 꽂으면 안 잠긴다는 뜻이에요."

웃음이 터졌지만, 그 다음 말은 달랐다.

"바로 이 앞에서 중국 어선들이 수시로 출몰합니다."

플랑크톤이 풍부하고 먹이 생태계가 안정된 이 황금어장에 중국 어선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서해 불법조업의 상당 부분이 이 해역에서 이루어진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불법조업이 발생해도 해경이 출동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 드넓은 바다에서 우리 영해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격렬비열도 앞바다를 눈앞에 두고서야 실감이 났다.

윤현돈 (사)격렬비열도사랑운동본부 회장 격렬비열도 현장에서 참가자들에게 섬의 가치와 보전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윤현돈 (사)격렬비열도사랑운동본부 회장 격렬비열도 현장에서 참가자들에게 섬의 가치와 보전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최미향

사비로 배를 띄운 사람

이날 탐방을 이끈 윤현돈 (사)격렬비열도사랑운동본부 회장은 배 삯을 사비로 냈다. 국립공원 측이 도시락을 지원했지만, 선박 비용은 고스란히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격렬비열도는 태안의, 아니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개발형 관광지가 아니라 자연형 관광지로 가야 해요. 그러려면 먼저 국민들이 이 섬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바다가 우리 수산물의 20%를 책임지고 있다는 것도요."

구글 지도에 이 섬이 한때 중국식 이름 '공열별도(空列飛列島)'로 표기됐다는 사실도 이날 나왔다. 문제가 제기된 끝에 바로잡혔다고 했다. 이름 하나가 영토를 흔드는 시대다.

한편 격렬비열도 국가관리연안항은 국비 480억 원을 투입해 2030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항이 생기면 1500t급 선박이 정박할 수 있게 된다. 그제야 일반 국민도 이 섬을 제대로 찾아올 수 있게 된다.

 안흥항으로 돌아오는 뱃길, 돌고래 세 마리가 나타났다. 가끔 출몰한다는 말에 다른 이들은 덤덤했지만 필자는 서둘러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정작 눈에 들어온 건 부표뿐이었고, 곁에 계신 스님은 세 마리를 봤다며 기뻐하셨다.
▲ 안흥항으로 돌아오는 뱃길, 돌고래 세 마리가 나타났다. 가끔 출몰한다는 말에 다른 이들은 덤덤했지만 필자는 서둘러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정작 눈에 들어온 건 부표뿐이었고, 곁에 계신 스님은 세 마리를 봤다며 기뻐하셨다. 최미향

스님은 돌고래를 봤다

오후 2시, 배를 돌려 서격렬비도 쪽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서쪽 끝을 알리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다들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무 말 없이.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 영해의 끝이 어디인지, 이 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가슴으로 느끼는 데는 그걸로 충분했다.

귀항 길, 방송에서 돌고래가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부리나케 갑판으로 나갔지만 내 눈엔 부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옆에 계신 스님은 세 마리를 봤다고 기뻐하셨다.

이제 30분이면 안흥항이다. 누군가 말했다. "여기 한 번 오면 중독성이 있어요. 기억이 딱 나고, 한 번 더 가보고 싶거든요." 필자도 그럴 것 같았다.

귀항 후 채팅방에는 하나둘 인사들이 올라왔다. 유례없이 잔잔했던 날씨 덕에 전원 멀미 없이 다녀왔다고, 멀리 무등산에서까지 와주신 분들께 감사하다고. 윤 회장은 이렇게 남겼다.

"대한민국 영해기점 태극기를 바라보며 느낀 감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충분히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격렬비열도. '생명의 섬', '서해의 독도', '특정도서 제125호'라는 숱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오늘도 이 섬을 지키는 것은 갈매기와 등대원 넷이다. 그리고 사비까지 기꺼이 내면서 이 섬을 알리겠다는 한 사람. 새들이 씨앗을 물어다 꽃밭을 만들 듯, 이 사람들이 조금씩 이 섬을 세상에 심고 있었다. 5대가 쌓은 덕이 허투루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도청에도 실립니다.
#격렬비열도 #특정도서 #서해영토 #해양주권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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