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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가게 19곳, 자동차 종사원 50명... 해방 후 청주의 모습

[청주 기억여행 1945~1960 41화] 업종별 조합 결성으로 본 1946년 청주 경제 지형도

등록 2026.05.11 10:43수정 2026.05.1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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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기억여행'은 해방 후부터 1960년 4·19 혁명까지 청주의 현대사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기자는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었던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이 문서는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1946년 8월~10월에 생산한 문서입니다. 충북 도내의 정치, 경제, 문화단체의 개요와 현황을 조사한 것입니다.[기자말]
해방 후 청주 인구는 급증했다. 1945년 말 청주 인구는 확인되지 않지만 전국적 추세와 더불어 청주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청년들은 일제의 징용과 징병 정책으로 조선 땅을 떠나야 했다. 또한 구한말 시절부터 땅 없는 농민, 굶어 죽기 직전의 조선인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상당수의 해외동포들이 귀국했다. 전국에서 전재동포 구제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군정에서도 전재동포 관련 예산을 편성했다. <서울신문>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7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재동포의 구제책은 그들 대부분이 조선의 중견근로자이며 금후의 전국 제 산업부흥에 핵심이 될 중추인물인만큼 당면한 가장 중대 문제임에 비추어 군정청 후생국에서는 각종 대책을 연구하는 중이다. 즉, 제일보로 금 12월 10일 1500만 원의 전재자 구제 비용을 지출하여 38도 이남 각지에 배분하였는데..." - <서울신문>, 1945.12.23.

1500만 원 예산 중 충북에 할당된 금액은 105만 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예산과 민간 차원의 '전재동포 구제후원회' 활동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근본적 대책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런 이유로 결국은 이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남방귀환동포충북린(麟)회가 결성된 것이다.

'우리는 남방으로부터 귀환하였으나 의식주의 곤란이 막심하므로 상호 구조하여 근로함으로써 건국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함'을 목적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명칭을 봤을 때 일본에서 귀환한 이들의 모임이었을 것이다.

회장 이동환, 부회장 최현수, 총무 신연우였다. 회원은 총 694명이었다. 회원 110명에 가족 584명을 합친 것이다. 전체 대상자(충청북도 14만 5000명) 중 회원은 극히 일부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구체적 활동이 밝혀진 바는 없다. 사실 전재동포 구제후원회 역시 일본이나 만주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청주역으로 오면 의류나 귀향 여비를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즉 취업 알선이나 주택 대책은 꿈도 꾸지 못할 문제였다.

'남방귀환동포충북린(麟)회'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 청주읍근로동원자동맹이다. 이 단체는 '본 동맹은 건국 달성 촉진과 전재동포를 조조구호(助助救護)함'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위원장은 정영준이었고 회원은 64명이었다.


전재동포 관련 모임은 또 있었다. '귀향전재동포로서 조직하여 토건사업에 각인의 귀중한 기능과 노력을 제공하여 생활을 보전함과 동시에 건축 사업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청주토건공사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이해당사자들의 상호부조 모임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지닌 회사였다. 대표이사는 구원청이었고 박근형, 박태진, 류근형, 백상기, 강석윤, 황인수가 이사였다. 회원은 642명이었다.

위와 같은 단체들이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취업과 경제적 자립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 산업이 군수산업으로 편재되어 산업 가동률이 저조했던 점을 생각하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주의 3인방

해방 후 청주의 3인방이 있었다. 황기봉은 행사나 집회 때마다 사회를 도맡아 진행했으며, 화려한 의상과 몸짓으로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포목점을 운영한 이만수는 각종 씨름대회를 무심천 광장에서 주관했다.

전국의 유명한 선수들을 초청해 씨름대회를 열었다. 1952년 초대 지방선거에서 도의원에 당선된 전명식은 달리기 실력이 탁월했다. 육상대회가 열리는 날은 전명식의 생일날이었다고 한다. 그는 단거리부터 마라톤까지 육상경기의 귀재였으며 축구심판도 보았다.

청수과자점 일제강점기 황기봉이 운영한 청수과자점. 우측에서 2번째 양복 입은 이가 황기봉
▲청수과자점 일제강점기 황기봉이 운영한 청수과자점. 우측에서 2번째 양복 입은 이가 황기봉 충북역사문화연대

청주의 3인방 중 황기봉은 청주약국 네거리에서 과자점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부터 남문로에서 청수과자점을 운영했는데, 그는 청주의 유명 인사였다. 그는 청주에서 행사나 집회가 열리면 그날은 '황기봉의 생일'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최동찬의 증언이다.

"시민운동 같은 거 하면은 황기봉의 잔치나 마찬가지여. 왜냐하면 그 사람이 복장을 이상하게 해 입고서. 여기다가 (손에) 차고서 이렇게 방울 달린 거 큰 거 있지? 동그랗게. 흔들고. 고깔모자 쓰고. 삐딱한 고깔모자 쓰고서, 막춤을 추면서 앞에서 막 선두를 하면은 꽹과리 치는 사람들 뭐 일반 시민들이 막춤을 추면서 따라서 호응을 하고. 그렇게 행사를 할 때는 그래서 '황기봉이의 날이다' 그런 정도로다가 이색적인 활동을 했고~"

이랬던 황기봉은 해방 직후 과자 제조·판매상들과 함께 '충북과자제조업조합'을 결성했다. 이사장은 서정식였고 황기봉·정병천·이진영·윤일영·서원배가 이사에, 육음옥·김용출이 감사에 취임했다. 현재의 육거리시장에는 당시 남주동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과자제조업조합 조직도
한국과자제조업조합 조직도 국사편찬위원회

포목점, 고무신가게 등 다양한 업종들이 있었다. 청주의 씨름대회 주관을 도맡아 한 이만수는 포목점을 운영했던 이다. 그는 1945년 8월 17일 중앙공원에서 열렸던 독립운동가 환영대회에 출옥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고무신을 기증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 남주동 시장에 상인회나 번영회, 업종별 친목 모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1946년도에 조사한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에는 별도의 내용이 없었다.

남주동시장 상인들의 모임은 확인되지 않지만, 여타 업종들의 모임은 일부가 확인된다. 청주부(府) 가공업조합은 조합장에 김동벽, 부조합장에 변속근이 있었다. 윤두병, 곽진영, 안상열, 민중식, 이지석, 허색, 최영수가 이사를 박종암, 정대록이 감사를 맡았다.

해방 직후의 일반적인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다. 일반 시민들이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지만 공무원, 교사, 일부 상인 등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영업을 했다. 충북자전거상공조합연합회가 결성되었는데, 이사장은 박계옥이 부이사장은 김후재가 맡았다. 김완수, 윤덕현, 윤형식이 이사를 손영섭, 한광우, 윤태수가 감사를 맡았다. 회원은 11명이었는데, 자전거 가게 업주들의 모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주상공업조합연합회 조직도
청주상공업조합연합회 조직도 국사편찬위원회

'동업자 간의 상호 친목'을 목적으로 결성된 청주양화점조합은 조합장 박찬석, 서기 박◯덕, 회계 한◯수가 있었다. 김동흠, 서병욱, 진재하가 간사를 맡았고 회원은 19명이었다. 즉 자전거가게가 19곳이나 있었던 것이다.

 청주양화점조합 설립 취지 및 임원
청주양화점조합 설립 취지 및 임원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4월 현재 청주 인구는 88만 6925명이다. 자동차는 약 48만 대이다. 2025년 하반기에 승용차만 40만 대를 돌파했다. 1955년 당시 청주 인구는 약 8만 1000명이었는데 자동차는 301대였다. 관용차 94대, 자가용 60대, 영업용 147대였다(청주문화원, <충북보감>, 1955).

해방 후 청주 자동차 대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청주자동차종사원동지회'가 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46년 8월~10월에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작성한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이 단체는 본정 3정목에 위치해 있었다.

이 단체는 '건국 교통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공헌하기를 기함, 민의에 의한 협회원의 복리를 위하여 분투하자. 난관을 극복하고 대동단결하여 건국촉성에 힘쓰며 공존공영'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회장 김윤기, 부회장, 임헌표, 총무부장 최순룡, 경리부장 이연, 후생부장 김용제가 임원을 맡았다. 이천규, 강두식, 안홍석, 박로적, 박용백이 고문을 맡았고 회원은 50명이었다.

충청북도 내 기관장·유력자가 모두 참여

현재의 충북대학교는 1951년도에 도립 청주농과초급대학(2년제)으로 개교했다. 1953년도에 도립 청주농과대학(4년제)으로 승격했고, 1956년도에 도립 충북대학으로 개명했다. 충북대학교는 해방 후부터 설립을 준비했다.

 충북대학교 설립 추진위원회 취지 및 임원.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1946년 조사한 자료
충북대학교 설립 추진위원회 취지 및 임원.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1946년 조사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충북대학의 설립을 기함'을 목적으로 한 충북대학 설립준비위원회 결성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945~46년도에 결성되었다. 회장 민영복(초대 청주시 부윤), 부회장 이◯구, 천종구가 맡았다. 정칠, 이종한, 차상기가 감사를 조용각이 서기를 맡았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충북대학교 설립 준비위원회에 충북 도내 기관장과 유력자가 모두 참여했다는 것이다. 고문으로는 충북도지사, 도청 각 부장·군수, 각 경찰서장, 도의회의원, 우체국장, 총무서장, 전매국장, 각 중등교장, 남상익, 송시헌, 윤치구, 곽순방, 손동하, 허의원, 각 군의회의원, 청원군 내 각 국장, 동 각 지서장, 부회의원 등 회장 민중식 외 41명이 있었다.

이사로는 각 부(府)·군 총무부장, 각 경찰서 총무과장, 부회의원, 회장 홍순복 외 11명이 선임되었다. 충북대학교의 설립에 도내 민중들의 관심이 뜨거웠음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해방 후 교육 분야와 더불어 활성화된 것은 언론사이다. 미군정의 '1도(道) 1사(社) 방침'으로 지방지로는 국민일보밖에 없었지만, 중앙지의 주재 기자와 판매지국이 있었다. 신문기자들은 신문기자 동지회를 구성했다. 회장 이종희, 부회장 이겸우, 서무 류만형이 그 직책을 맡았다.

'의료 및 보건지도의 개량 발달을 도모하며 국민 체력의 향상에 관한 국책에 협력함'을 목적으로 충북치과의사회가 결성되었다. 회장 이세근, 부회장 박창희, 총무 이영옥, 이사 김진태가 임원이었다.

문화단체도 결성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한글 폐지 정책을 강구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까지 단계적으로 이 정책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는 '제3차 조선교육령(1938년)'과 '제4차 조선교육령(1943년)'이 있었다.

동시에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1940년 2월 1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전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그러다 보니 해방 후에 한글을 되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리는 훈민정음의 정신에 재하여 그 거룩한 이상의 달성을 기함. 우리는 조선어학회의 지도아래 통일된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온 힘을 다하기를 기함. 우리는 우리의 한글문화를 크게 일으킴으로써 우리나라 문화를 향상시키고 나아가서는 인류 문화에 이바지하기를 기함'을 목적으로 한글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박종한이 지부장이었고 회원은 13명이었다.

교사단체도 만들어졌는데, '교원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교육의 완수를 기하며 단원 친목 후생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교원단이 만들어졌다. 회장과 부회장 명단은 확인되지 않고 김홍석, 노◯우, 박성범, 백찬욱, 이광우가 총무부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체육 분야에도 모임이 결성되었다. 충북체육회는 회장 박노태, 총무부 김영진, 경기부 전명식이 맡았다. 전명식은 1952년도에 충북도의원에 선출되는 인물이다.

충북탁구협회는 '심신의 연마의 체육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회장 이종수, 부회장 김명한·이정원, 간사 1조칠복·채동환·김열경이 맡았다.
#전재동포 #충북대학 #황기봉 #한글 #탁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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