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대학교 설립 추진위원회 취지 및 임원.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1946년 조사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충북대학의 설립을 기함'을 목적으로 한 충북대학 설립준비위원회 결성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945~46년도에 결성되었다. 회장 민영복(초대 청주시 부윤), 부회장 이◯구, 천종구가 맡았다. 정칠, 이종한, 차상기가 감사를 조용각이 서기를 맡았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충북대학교 설립 준비위원회에 충북 도내 기관장과 유력자가 모두 참여했다는 것이다. 고문으로는 충북도지사, 도청 각 부장·군수, 각 경찰서장, 도의회의원, 우체국장, 총무서장, 전매국장, 각 중등교장, 남상익, 송시헌, 윤치구, 곽순방, 손동하, 허의원, 각 군의회의원, 청원군 내 각 국장, 동 각 지서장, 부회의원 등 회장 민중식 외 41명이 있었다.
이사로는 각 부(府)·군 총무부장, 각 경찰서 총무과장, 부회의원, 회장 홍순복 외 11명이 선임되었다. 충북대학교의 설립에 도내 민중들의 관심이 뜨거웠음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해방 후 교육 분야와 더불어 활성화된 것은 언론사이다. 미군정의 '1도(道) 1사(社) 방침'으로 지방지로는 국민일보밖에 없었지만, 중앙지의 주재 기자와 판매지국이 있었다. 신문기자들은 신문기자 동지회를 구성했다. 회장 이종희, 부회장 이겸우, 서무 류만형이 그 직책을 맡았다.
'의료 및 보건지도의 개량 발달을 도모하며 국민 체력의 향상에 관한 국책에 협력함'을 목적으로 충북치과의사회가 결성되었다. 회장 이세근, 부회장 박창희, 총무 이영옥, 이사 김진태가 임원이었다.
문화단체도 결성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한글 폐지 정책을 강구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까지 단계적으로 이 정책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는 '제3차 조선교육령(1938년)'과 '제4차 조선교육령(1943년)'이 있었다.
동시에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1940년 2월 1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전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그러다 보니 해방 후에 한글을 되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리는 훈민정음의 정신에 재하여 그 거룩한 이상의 달성을 기함. 우리는 조선어학회의 지도아래 통일된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온 힘을 다하기를 기함. 우리는 우리의 한글문화를 크게 일으킴으로써 우리나라 문화를 향상시키고 나아가서는 인류 문화에 이바지하기를 기함'을 목적으로 한글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박종한이 지부장이었고 회원은 13명이었다.
교사단체도 만들어졌는데, '교원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교육의 완수를 기하며 단원 친목 후생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교원단이 만들어졌다. 회장과 부회장 명단은 확인되지 않고 김홍석, 노◯우, 박성범, 백찬욱, 이광우가 총무부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체육 분야에도 모임이 결성되었다. 충북체육회는 회장 박노태, 총무부 김영진, 경기부 전명식이 맡았다. 전명식은 1952년도에 충북도의원에 선출되는 인물이다.
충북탁구협회는 '심신의 연마의 체육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회장 이종수, 부회장 김명한·이정원, 간사 1조칠복·채동환·김열경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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