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감옥 부근 바다. 여순감옥 가까이에는 황해와 발해가 서로 마주치는 바다가 있다.
장애라
곧 이곳 대륙에서 그가 간 길을 뒤따라 가겠지만 그가 영면한 여순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에 발걸음이 무겁다. 떠나기 전에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보고 싶어, 그가 하얼빈에서 열차를 타고 도착했던 여순역을 찾는다. 빛나는 그가 어울리지 않게 용수를 쓴 채, 마차에 실려 감옥으로 향했던 장소다. 여순 감옥 도착 순간부터 사형 순국일까지, 이곳에서 직접 알게 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적은 같은 대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게 한다. 여순을 떠나는 길, 자꾸만 뒤돌아보는 눈에 바다가 들어온다. 하늘과 맞닿은 흐린 바다에 총총히 떠 있는 배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왔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일본의 만주 진출로 얼룩진 대련시는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며 크게 달라졌지만 지나간 역사의 흔적은 여전히 뚜렷하다. 고유한 양식을 간직한 러시아식 건물과 일본식 건물이 아직도 사용 중이라 한다. 아마 전쟁이 남긴 황폐한 상처에 대한 기억도 애써 드러내지 않을 뿐, 그 안에서는 아직도 진행 중일 것이다. 우주선이 오가고 AI가 문명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전쟁 소식이 들려온다.
안중근 의사가 목숨으로 외쳤던 평화론을 생각한다. 당시 일본제국이 침략을 합리화하면서 주창한 평화론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완전히 다르다. 이른바 일본처럼 앞서 발전한 나라가 한국을 비롯한 미개발·후진국들을 개발시켜 하나의 질서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라면, 안중근 의사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다르듯 국가도 다양함과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독립한 상태로 동맹과 화합으로 동양과 세계평화를 위해 애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일본의 평화론은 약육강식이고 그에 비해 안중근 의사는 풍요로운 다양함 속에서 모두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형시간에 쫓겨 감옥에서 집필 중이었던 그의 '동양평화론'은 처음 시작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일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개한' 조선의 한 필부가 깨달은 평화의 본질은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발전해 온 오늘의 문명 앞에서도 조금도 낡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세계가 더욱 절실히 귀 기울여야 할 평화의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만주벌판. 대련에서 심양, 장춘을 지나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안에서 촬영
장애라
대련역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하기 전 선택한 풍찬노숙의 길이다. 당시 황해도 신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기차를 타고 북쪽에서 내려와서 서울울 거쳐 부산으로 간 다음 거기서 배를 타고 다시 한반도 북쪽 끝으로 간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를 이끌었을까? 그의 평화를 향한 투신이 거룩하다. 대련역에서 하얼빈까지 고속철로 거의 천 킬로미터. 살아 있던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여순으로 압송되어 온 길이자, 죽은 이토가 시신이 되어 되돌아간 길을 거꾸로 되짚어 가는 여정이다. 대련, 봉천(심양), 장춘, 그리고 하얼빈에 이르는 기찻길, 창밖은 가없이 펼쳐진 광활한 들판, 유명한 만주 벌판이다.
생존을 위해 이곳 물설고 낯선, 만주로 온 조선의 백성들은 그 척박한 땅을 일궈 옥토로 만들었다. 초목이 푸르기 시작한 한반도에 비해 이제야 봄이 시작되는 이 추운 땅에서 벼농사의 기적을 이룬 사람들, 그 모진 고생의 시간을 짐작하기 어렵다. 이번 순례길에는 특히 중국이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투자를 많이 한 관광지라는 이유도 있지만, 숙소의 작은 물건에서 거리의 건물들, 대중교통에 이르기까지 발전이 눈에 띈다.
거대한 대륙, 끝없는 평원, 무한한 자원, 또한 그 자원을 개발, 이용할 인적 자원도 풍성한 나라. 그에 비해 자원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 해외에서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하고 다시 수출하면서 살아온 우리나라. 이 만주 벌판을 옥토로 가꾼 우리 선조들처럼, 고난을 딛고 경제를 일구고 문화강국을 이루면서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렇게 서로 존중하며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자는 게 안중근 의사의 큰 뜻이 아닐까.

▲731 세균부대전시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증거를 전시하는 곳, 만주 하얼빈
장애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미개국을 계몽시킨다는 미명하에 자행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전쟁, 하얼빈에는 그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이 있다. 침략한 나라의 민간인과 전쟁 포로들을 대상으로 세균전 연구와 생체 실험을 자행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 일본이 패망하면서 폭파했으나 그 잔해를 모아 역사박물관으로 만든 곳, 특별하게 생긴 건물 앞에 '침화일군 제731부대 죄증진열관'이라는 큰 표지석이 있다. 일본군 731부대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의 증거를 마주하게 하는 공간이다.
표지석 옆에는 메마른 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서 있다. 마치 무심하고 건조한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듯하다. 평범한 마음으로는 견디기 힘든 곳이리라 짐작한다. 영화보다 더 잔혹한 전시물들을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넓은 부대 마당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아마 못 볼 것을 본 이후 충격이 컸던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우두머리를 처단하는 것을 바로 '의거'-정의를 위해 개인이나 집단이 사사로운 이해타산을 생각함이 없이 일으킨 행동-라 한다.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곳. 역 바닥의 세모 표시는 당시 안중근 의사의 위치, 네모 표시는 이토의 위치
장애라
무거운 마음으로 하얼빈역을 향한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이루어진 하얼빈역은 그날 그가 총을 쏜 자리와 이토가 총을 맞은 자리를 표시하여 보존하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의 군인(당시 적에 맞서 싸운 모든 백성은 의병이었다)이 평화를 파괴하려는 침략국 원흉을 처단한 역사적 장소에서 오늘도 대륙을 잇는 기차가 떠나고 또 들어선다.
"하얼빈역 철길은 총 맞기 좋은 자리다."
"나는 철도를 좋아한다. 쏘기도 좋은 자리다."
-안중근과 우덕순의 대화에서(김 훈 작가의 '하얼빈')
많은 작가들은 가혹한 일제강점기의 만주와 연해주, 사할린 등지에서 끝내 좌절하지 않고 고군분투했던 조선인들과 그들의 강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미리 책을 읽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만주 벌판을 달려 이곳 하얼빈역까지 직접 와보니 이제야 잘 알 것 같다. 길과 길이 이어져 있듯 그들과 우리 또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순례의 큰 깨달음이다. 이제 안중근 의사를 하얼빈역에 두고 떠난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조금이라도 남았을 그의 흔적을 다시 찾아본다. 당시 하얼빈공원으로 불리던 조린공원, 여기서 그는 동지들과 의거 계획을 논의했다. 그 공원 밖 사진관에서 동지들과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그는 순국 전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 달라'는 뜻의 유언을 남겼다. 공원을 나와 그가 잠시 묵었던 김성백 집터를 찾는다. 원래 있었던 2층 목조 가옥은 사라지고 서민들이 사는 평범한 길가 주택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두운 그곳을 서성이는 동안, 하얼빈역 앞 광장은 환한 빛으로 내내 떠올랐다.

▲하얼빈역 광장.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코레아 우레!'(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역 광장
장애라
하얼빈 광장을 가득 채운 밝은 햇살, 역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 그가 그토록 원했던 평화는 그 하늘처럼 맑고 푸르고 무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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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식물, 광물 등 좋아하는 것이 많아 지금까지 분주하게 세상을 살았습니다. 덕택에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임을 구석구석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서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도 매일 변화를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선택과 집중을 할 나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듣고 이야기 들려주기'를 하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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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에서 하얼빈으로, 다시 하얼빈에서 여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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