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폭력의 연쇄, 알바니아 산악마을에서 70년 이어진 복수극

[김성호의 독서만세 312] 이스마일 카다레 <부서진 사월>

등록 2026.05.04 10:59수정 2026.05.04 14:25
0
원고료로 응원
부서진 사월 책 표지
▲부서진 사월 책 표지 문학동네

70년을 이어온 피의 복수다. 베리샤 가문과 크리예키크 가문 간에 이어진 복수의 연쇄는 무려 4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설은 베리샤 가문의 아들 그조르그가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삼월의 어느 날 죽 뻗은 길 끝 경사진 언덕 아래 매복한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오늘 그가 죽일 크리예키크가의 아들이 이 길 저편에서 이편으로 걸어올 것이다. 오랫동안 참아야 한다. 움직여선 안 된다. 이토록 오랫동안 한 자리에 돌처럼 굳어있던 날이 있었을까. 추위에 몸을 떨며 정신을 붙드는 그조르그 앞에 그의 목표가 나타난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알바니아 산악지대 마을에 실재하는 관습법 '갹마르야 Gjakmarrja'로부터 비롯됐다. 현지말로 '피를 흘리는'이란 뜻으로, 죗값을 피로 치르게 하는 오랜 규칙을 말한다. 죄란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사람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죄가 된다. 어느 것은 부상을 입히는 정도로 갈무리되지만, 어느 것은 목숨으로만 치러질 수 있다. 그조르그가 이행하는 베리샤 가문의 복수는 크리예키크가의 목숨을 앗아 오는 것이다. 그리고 복수가 성공하면, 크리예키크가의 아들이 죽는다면 저들의 다른 아들이 살인자인 그조르그를 처단할 권한을 갖는다. 70년을 이어온, 44명을 죽인 소설 속 관습법 '카눈'의 규정이다.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혐오스러웠다. 1월의 그 아침에 아버지가 그의 마음속에 지피려 애썼던 크리예키크가에 대한 증오심은 반짝이는 햇살에 저항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속에 증오의 불길이 지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태도가 너무도 냉랭했던 탓이라는 사실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수가 이어져 내려온 오랜 세월 동안 증오심은 이미 천천히 식어버린 것이 틀림없었으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애초에 증오심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느껴질 정도였다. -53p

70년간 44명을 해친 증오 없는 복수

그조르그의 복수는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복수는 실패했다. 준비는 충분했으니 이유는 그조르그가 살인을 해본 적이 없어서였을 테다. 카눈은 죽음을 거둘 권리가 있는 자가 다만 부상만을 입혔을 때, 그러니까 피의 값을 반만 치르고 나머지 반절은 회수하지 못했을 때를 이렇게 다루고 있다. 복수한 가문은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갖는다. 나머지 반절로써 부상만 입힐 권리를 갖거나, 재물로 부상에 대한 값을 치르고 다시 완전히 죽일 권리를 갖거나다.

베리샤 가문은 더 명예로운, 더 적확하게는 불명예스런 선택지를 피하고자 후자를 택한다. 없는 살림에 값을 치르고서 재차 복수를 시도하기로 한다. 집안의 식탁은 눈에 띄게 부실해지고, 크리예키크가의 우리엔 새로 산 가축이 들어온다. 돌처럼 굳어 제가 죽여야 할 상대를 기다리며 그조르그는 이번엔 결코 실패해선 안 된다고 되뇐다.

20세기 초쯤일까. 알바니아의 산악지대 마을엔 죽고 죽이는 일이 거듭된다. 그저 돌출하는 개별 사건이 아니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죽고 죽임들이 마치 운명의 물레방아가 돌아 찍고 찍히듯이 거듭된다. 가문과 가문이 번갈아 상대를 겨냥해 죽고 죽인다. 도시의 법률은 산악지대 마을까지 닿지 않는다. 소설은 이 마을과 저 마을, 나아가 알바니아의 모든 산악마을들을 가로지르는 핏값의 연쇄를 독자 앞에 펼쳐낸다.

법이다. 규칙이다. 말하자면 복수하고 복수당하는 일을 당사자가 아닌 공동체가 주관한다. 카눈에 따르면 복수에 성공한 자들은 피의 세금이라 불리는 돈을 치러야 한다. 그것도 가능한 빨리. 산악지대를 관장하는 공작의 성이 있는 곳, 오로쉬다. 소설은 그조르그의 복수로부터 오로쉬로 이야기의 무대를 옮겨간다.


법이 사람을 살해하는 땅

그곳엔 그조르그 말고도 많은 이들이 있다. 복수에 성공했단 뜻의, 그러니까 곧 복수의 대상으로 전락할 운명을 보여주는 검은 리본을 소매에 단 자들이 그득하다. 카눈에 따라 가능한 빨리 오로쉬로 달려온 이들에게 피의 세금을 치르는 일은 너무도 천천히 다가온다. 마치 카눈에 따라 복수하고 피의 세금을 치르려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확인시키려는 듯 수많은 검은 리본 단 사내들이 서로를 발견하게 한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아마도 거의 모두가 카눈이 정한 휴전이 끝난 5월이 오면 제가 쏘아 죽인 가문의 자식에게 죽음을 맞을 것이다.


소설은 두 개의 시선을 교차해 전개한다. 하나는 그조르그, 카눈이 작동하는 산악마을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저 멀리 다른 나라에서 여러 나라 국경을 넘어 신혼여행을 다니는 젊은 부부 베시안과 디안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오로쉬의 공작이 관할하는 알바니아의 산악지대에선 관습법 카눈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저 멀리 다른 세계로부터 건너온 부부의 눈에선 오로지 카눈을 지키기 위해 죽고 죽이는 해묵은 복수의 연쇄고리가 경악스러운 때문이다.

카눈에 의하면, 누군가가 손님을 배웅하러 나갔는데 손님이 면전에서 죽었다면, 그가 손님을 위해 복수할 의무가 있었다. 반대로 이미 등을 돌리고 돌아선 뒤에 쓰러졌다면, 그런 의무를지지 않아도 되었다. (중략) 낯선 손님을 위한 복수의 책임이 베리샤가의 일족에게 돌아가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즉석에서 결성된 위원회는 그 사건을 세심하게 검토한 뒤, 결국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낯선 남자는 등을 땅바닥에 대고 얼굴을 마을로 향한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관습법에 따르면, 낯선 사람에게 잘 곳과 이불을 제공했기에 그가 마을을 벗어나지 않은 이상 보호할 의무가 있는 베리샤가가 이제 그를 위한 복수의 의무를 져야 했다. -38p

베리샤 가와 크리예키크 가 사이에 있었던 70년간의 복수는 베리샤 가문의 집에 단 하루 머문 손님이 크리예키크 가의 아들에게 죽었기 때문에 시작됐다. 손님을 신처럼 대접해야 하는 것이 카눈의 법도였고, 손님의 죽음을 복수해야 할 의무 또한 카눈에 규정돼 있었던 때문이다. 만약 그 길손이 베리샤가 아닌 다른 가문의 문을 두드렸다면, 또 카눈의 복잡한 세부규정에 따라 한 걸음 더 나아갔거나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죽었다면 죽은 이들이 무덤에서 일어나고 없었던 아이들이 태어나며 전혀 다른 이들이 죽고 사라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복수와 살해에 깃든 아름다움

<부서진 사월>이 그리는 건 관습법과 그에 따라 죽고 사는 이들의 모습이다. 조금의 원한도, 분노도 없이 상대를 죽이고 저 자신도 죽는 일이 당연한 세계가 있다. 외부의 시선으론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분명히 이뤄진다. 소전서림이란 공간에서 이뤄진 고전탐독클럽이란 모임을 통해 이 책을 읽었다. 참석한 어떤 이는 죽고 죽이는 일의 연쇄로부터 낭만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나 역시 일말의 아름다움을 보았으니까. 소설 가운데도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산악 지방 주민들과는 겨우 스무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불쑥 디안의 어깨를 잡아끌며 말했다. "저것 좀 봐. 저 사람 오른쪽 소매에 달린 검은 리본 봤어?"
"응, 응." 그녀가 대답했다.
"저기 또 죽음의 표시가 있네. 그리고 저기, 저기에도 있고."
그는 흥분하여 숨을 헐떡였다.
"끔찍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뭐라고?"
"내 말은 그러니까,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하다는 뜻이야."
"사실이야.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해야겠지."
-81p

신혼부부 중 아내인 디안은 살인자이자 곧 살해당할 이들에게서 아름다움을 읽는다. 나는 그를 이렇게 이해한다. 복수와 살해, 카눈이 규정한 피의 연쇄는 그조르그와 같은 이들이 감당한다. 그 안엔 분노와 폭력, 생의 절멸만이 있지 않다. 가족을 아끼고, 명예를 지키려 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따르려는 이들의 희생과 용기 또한 담겨 있다. 그와 같은 미덕을 살해와 살해당함의 반복으로, 오로지 오로쉬의 부로써 귀결케 하는 관습법의 폭압이 함께 자리할 뿐이다. 누군가의 눈엔 그저 폭압과 피만이 보이겠으나, 디안과 같은 이는 아름다움을 함께 본다. 나는 뒤의 사람이 더욱 깊고 정한 눈을 가졌다고 이해한다.

소설은 유럽을 가로질러 다양한 문화를 목격하려는 신혼부부의 시선을 통해 알바니아 산악지대의 복수를 비춘다. 가문과 명예를 위하려는 마음이 살해와 죽음으로 귀결되게 하는 관습법 카눈의 부당함이 먼저 눈에 띄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독서가 거기서 멈추어선 절반도 채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복수 안에 아름다움이 있듯, 카눈에도 건질 구석이 있겠다.

읽어내야 할 건 그저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관습법이란 그저 관습에서 머물지 않는다. 법적 지위를 갖는 규칙으로, 어긴 자를 처벌한다. 법 앞에 모두가 수긍하고 따라야 한다. 관습법이 복수를 규율한다면 그것은 복수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복수를 법 안에 들여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함이다. 갈등이 극단적으로 번지기 쉬운 산악이며 초원지대에서 이와 같은 관습법이 발달해왔단 사실을 지식 깊은 이라면 모르지 않을 테다. 필연적인 개인과 집단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멈추기 위한 규칙, 카눈의 출발 또한 그러했을 테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카눈은 인간성을 억압하고 끊이지 않는 폭력의 고리로써 선한 이를 살해한다.

주목할 것은 이것이다. 과연 소설 속 무의미한 폭력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운가. 첫 살해로부터, 복수의 첫 사건으로부터 수대가 흘러 기원조차 알 수 없게 된 전쟁이 얼마나 많은가. 뿌리가 같은 신을 달리 섬기는 이스라엘과 이란, 그리고 미국의 전쟁을 바라본다. 이스라엘인을 죽이는 이란의 청년과 그 반대의 자식이 그조르그와 얼마나 다른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전쟁을 외치는 이에게 표를 던지는 이에게도 아름다움과 의로움이 깃들어 있지는 않은가. 무엇이 아름다움을 피로 바꾸는가. 독자가 이 질문을 스스로 묻게끔 하는 한 나는 이 소설에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언제 살인을 했나요?"
"그저께요."
언제 살인을 했나요…… 마음속으로 그 질문을 되뇌면서, 그는 새로운 날을 맞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집 짓는 일이나 혼인 준비, 혹은 첫아이의 탄생에 대해 묻는 투였다.
-68, 69p

덧붙이는 글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은이), 유정희 (옮긴이),
문학동네, 2022


#부서진사월 #문학동네 #이스마일카다레 #유정희 #김성호의독서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학교 정문에 걸린 현수막, 34년 교직 중 이런 문구 처음 학교 정문에 걸린 현수막, 34년 교직 중 이런 문구 처음
  2. 2 감자 들고 학교 간 아이, 교사가 거절하며 건넨 씁쓸한 말 감자 들고 학교 간 아이, 교사가 거절하며 건넨 씁쓸한 말
  3. 3 익산역 앞 원도심에서 저녁마다 벌어지는 일...모두 놀랍니다 익산역 앞 원도심에서 저녁마다 벌어지는 일...모두 놀랍니다
  4. 4 '국민배당금제'가 사회주의라는 궤변 '국민배당금제'가 사회주의라는 궤변
  5. 5 한강변에 파리 센강보다 큰 수영장 가능하다...새로운 시대의 개막 한강변에 파리 센강보다 큰 수영장 가능하다...새로운 시대의 개막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