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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6.05.17 10:10수정 2026.05.17 10:10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문강에 삽을 씻고>. 제목이 어딘가 낯설고도 시적인 느낌을 품고 있었다. 무슨 뜻일까 싶어 책장을 넘겼다. 책은 거창한 성공담이나 요리 이야기가 아니라, 이곳을 찾아온 손님에게 건네는 조용한 인사로 시작됐다.
"이 책은 지금 이 순간 책을 펼친 당신을 위해 썼습니다."
책에는 손님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것, 특히 "왜 식당 이름이 저문강인가요?"라는 물음에 진심으로 답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잠시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소책자였지만, 몇 장의 글 속에는 손님을 대하는 이 식당의 태도와 철학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책을 덮고 밖으로 나오자, 주인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레스토랑 안이 아니라 밖에서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피며, 어떻게 하면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저문강'의 주인인 최기봉(64)씨를 만났다.

▲ 손님들의 모습을 세심히 살피며 더 편안한 공간을 고민하는 ‘저문강’의 최기봉 대표.
진재중
주인이 직접 심은 나무가 만든 풍경
횡성호를 따라 이어진 섬강 길을 천천히 달리다 보면 강변 옆으로 조용히 자리한 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주차장 한편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은 것은 울창한 삼나무 정원이었다. 하늘 높이 곧게 뻗은 삼나무들은 이곳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온 듯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나무들은 지금의 주인공이 30여 년 전 직접 심어 가꿔온 것들이었다.
"처음 심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잘 자랄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이 레스토랑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삼나무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주인공이 30년 전 직접 심은 메타세쿼이아가 긴 세월의 풍경을 품은 채 저문강을 지키고 있다.
진재중
부모님의 삶에서 시작된 '저문강'
이곳은 오래전부터 그의 부모님이 삶의 터전을 일구어온 공간이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삽을 들고 밭으로 나가고, 해가 질 때까지 흙을 일구며 작물을 돌보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렇게 하루의 긴 노동이 끝나면 부모님은 늘 섬강으로 내려가 흙 묻은 삽을 씻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이 자리에 가게를 짓게 되었을 때, 주인공의 동생은 문득 정희성 시인의 시 '저문강에 삽을 씻고'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가게 앞에는 여전히 섬강이 흐르고 있었고, 부모님의 삶과 노동, 그리고 하루 끝에 남겨진 고요한 풍경이 시 속 장면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름을 고민했지만 결국 가족의 시간과 기억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말이 바로 그 한 문장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식당의 이름은 '저문강'이 되었다.

▲ 손님들에게 건네기 위해 만든 ‘저문강에 삽을 씻고’ 소책자.
진재중
손님을 위한 저문강의 느린 배려
"손님들이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기다리는 시간이라도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손님들이 기다리는 시간조차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늘 고민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세월을 품은 삼나무 숲과 옛스러운 장독대, 그리고 정원 곳곳에 놓인 편안한 의자들이 그런 마음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긴 줄 앞에서 초조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정원을 천천히 거닐고, 꽃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기다림은 흔한 식당 앞 대기가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작은 휴식에 가까웠다.

▲ 꽃이 핀 공간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손님들.
진재중
공간에도 진심을 담은 저문강
"손님들이 밥만 먹고 가는 곳이 아니라 잠시라도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고 늘 고민합니다."
그가 조용히 말을 이어가는 순간, 표정에는 공간 하나에도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진심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횡성 섬강 옆 조용한 길 끝에서 만난 '저문강'은 흔한 음식점과는 조금 달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음식 냄새보다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었다.
작은 정원을 닮은 마당에는 계절 꽃들이 피어 있었고, 흙으로 바른 은은한 분홍빛 벽과 따뜻한 조명이 오래된 집처럼 사람을 맞이했다. 화려한 인테리어나 요란한 광고 대신, 한 그릇의 음식과 공간 곳곳에 주인장의 생각과 삶의 태도가 담겨 있었다.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이유를 묻자 그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 화사하게 핀 꽃들 사이로 레스토랑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진재중

▲ 레스토랑 분위기
진재중
포도주 한 잔에 담긴 저문강의 철학
이곳의 특별함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손님들에게 한 잔씩 건네는 포도와인에도 저문강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섬강을 따라 포도밭이 있었다. 1970년대부터 가족은 포도를 재배했고, "포도를 조금 더 가치 있게 만들 수 없을까"라는 고민 끝에 직접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사람들에게 포도주 한 잔과 음식을 내어주던 시간이 지금의 저문강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저문강은 많은 비용을 들여 직접 포도주를 만든다. 손님이 늘면서 와인을 판매하면 충분한 수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이곳은 다른 선택을 했다.
"판매를 시작하면 지금처럼 모든 손님께 한 잔씩 편하게 드리기 어려워지잖아요."
이곳에서 와인은 상품보다 환대에 가까웠다.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 그 방식을 지키기 위해 이익보다 원칙을 선택한 셈이다.

▲ 와인이 곁들여진 레스토랑의 식탁이 한층 깊은 분위기를 더한다.
진재중
자신을 덜어 손님에게 내어준 '정직한 가격'
그는 저문강의 가격에 대해 "단순히 싸게 파는 개념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제가 직접 손보고 만들 수 있는 건 최대한 스스로 하면서 아낀 시간과 비용을 손님들에게 다시 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문강의 가격은 단순히 저렴한 가격이라기보다, 제가 덜 쓴 비용을 손님께 되돌려드리는 정직한 가격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어 그는 "손님들이 부담 없이 편하게 쉬었다 가셨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크다"며 조용히 웃어 보였다.
그의 마음은 음식 가격에도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저문강의 주인은 좋은 재료를 쓰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선택을 해왔다고 말했다. 손님에게 내놓는 한 끼만큼은 계산보다 정성과 진심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손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음식, 가족에게도 그대로 내놓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겠다는 기준만큼은 지금까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저문강의 가격은 단순히 저렴한 가격이 아니라, 자신이 덜 가져간 몫을 손님에게 돌려주는 '정직한 가격'에 가까웠다.
그는 앞으로 물가가 오르고 언젠가는 가격을 조정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지켜온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려함보다 진심을 먼저 생각하는 공간. 저문강은 단순히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따뜻한 마음까지 함께 내어주는 곳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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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과 고향의 정서를 담아 따뜻한 여운을 전하는 레스토랑 풍경.
진재중
세대를 이어주는 식당의 철학
저문강의 철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장사꾼이 되지 말고, 사업가가 되어 돌아와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단순히 음식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사랑받는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마음에 새긴 아들은 쉬는 날마다 다른 식당을 찾아다니며 손님들의 표정과 서비스 방식을 살폈고, 책을 통해 경영을 공부했다. 왜 어떤 가게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어떤 곳은 금세 사라지는지 스스로 묻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지금의 저문강을 만들었다.

▲ 기차 레일과 터널을 배경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배려가 담긴 공간의 모습.
진재중
체인점 대신 저문강다움을 택하다
현재 저문강은 아들이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젊은 세대와 오랜 단골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특정 세대만을 위한 식당이 아니라, 시간을 이어주고 사람을 이어주는 장소를 꿈꾸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유명한 식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횡성을 떠올렸을 때 한우뿐 아니라 '저문강'도 함께 기억되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에는 지역과 함께 오래 남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었다. 체인점과 가맹점 제안도 있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 지금의 분위기와 마음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자신의 아이들이 이 식당을 이어 3대째 운영하게 되더라도, 지금의 철학만큼은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 아들에게 삶의 뜻을 잘 이어주길 바라며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
진재중
작은 원칙이 만든 저문강의 시간
저문강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고 했다.
"다른 가게보다 10% 저렴하게, 20% 더 드리고, 30% 더 친절하자."
가격은 부담 없이, 양과 정성은 넉넉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손님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 저문강이 오래도록 지켜온 원칙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친절은 단순한 미소나 형식적인 인사에 머물지 않는다. 손님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배려하려는 마음에 가까웠다. 그는 이 세 가지를 지금도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거창한 경영 철학은 아니지만, 그런 작은 기준들이 쌓여 지금의 저문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손님들이 식당을 나서며 "잘 먹었다", "다시 오고 싶다", "누군가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 저문강은 오늘도 그 소박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변함없이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 레스토랑 분위기
진재중
능소화에 담은 기다림의 시간
"저는 30대 때부터 이곳을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사람들이 잠시 머물며 마음까지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쉼터 같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하루하루 직접 공간을 손보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왔다. 그렇게 쌓인 시간 끝에 지금의 저문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제 그 마음은 아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아들 역시 같은 꿈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꿈처럼 횡성에 오면 꼭 한 번쯤 들르고 싶은 명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 마음으로 지난해부터 가게 주변에 능소화를 심기 시작했다. 아직은 작은 변화에 불과하지만, 시간이 지나 능소화가 담장을 가득 메우고 사람들이 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는 공간이 된다면, 저문강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잠시 머물며 사진을 찍고, 계절의 풍경을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고 싶어 능소화를 심고 포토존을 만들었다.
진재중
손님을 위해 다시 삽을 드는 사람
저문강은 화려한 간판이나 유행을 앞세운 맛집은 아니었다. 대신 이곳에는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하는 편안함이 있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강바람을 바라보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 음식보다 먼저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곳 곳곳에 스며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 직접 나무를 심고 길을 다듬으며 공간을 가꿔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는 다시 삽을 들었다. 손님들이 조금 더 편히 쉬어갈 공간을 만들기 위해 천천히 섬강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해는 저물고 있었고, 붉게 물든 섬강 너머로 그의 뒷모습이 길게 이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이 쉬어갈 자리를 묵묵히 만들어가는 사람의 풍경처럼 아련히 남고 있었다.

▲섬강 해가 저물어가는 섬강 너머로 저문강의 이름이 조용한 실루엣처럼 다가오고 있다. 붉게 물든 강변과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하루의 끝은 천천히 쉼의 시간으로 스며든다.
진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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