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5.06 11:51수정 2026.05.06 11:51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린 시절 고향 동네 어귀에 아주 커다란 이팝나무 몇 그루가 있었습니다. 나무가 워낙 커서 이팝꽃이 필 때면 동네가 하얀 꽃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죠. 그때는 나무 이름이 이팝나무인지도 몰랐습니다. 봄이 되면 하얀 꽃을 피우는 키 큰 봄꽃나무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아득히 멀어서 옅은 보랏빛으로 보이는 산과 들녘의 끝자락에서 불어온 바람에 이팝꽃이 춤 추듯 살랑 거리는 모습은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되곤 합니다. 이팝꽃이 필 무렵 농촌은 일년 중 가장 바쁜 농번기입니다. 모내기 준비와 밭작물을 파종하는 일로 정신이 없을 때죠. 바쁜 농사일로 동네 어른들이 논으로 밭으로 일을 나가는 한낮엔 동네가 텅 비었습니다.
어쩌다 동네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놀던 아이들마저 자신들의 아지트로 숨어든 날에는 적막감마저 들 정도였지요. 소리마저 잠든 것 같은 깊은 적막감에 빠진 마을을 지킨 건 이팝나무였습니다. 시골에서 이팝나무의 존재감이 커지는 계절은 봄보다 여름이었습니다. 나무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고, 무엇보다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었으니깐요. 여름 내내 이팝나무 아래엔 널찍한 평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어른들은 낮잠을 즐기거나 장기나 바둑을 두었어요. 고구마 줄기를 다듬기도 했죠. 아이들에겐 즐거운 놀이터였습니다.

▲이팝나무 도로변 가로수로 식재된 이팝나무에서 만개한 이팝꽃이 도시의 봄날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가로수로 조성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팝나무도 많지만 더러는 키가 크고 가지가 풍성한 꽃길 도로를 만나기도 합니다.
한인숙
고향을 떠나온 후 오랫동안 이팝나무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십여년 전 운전 중에 우연히 도롯가에 피어있는 이팝꽃을 보았습니다. 이십년은 족히 넘는 시간을 지나 만난 이팝꽃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도 꽃 이름은 몰랐습니다. 도로에 가로수로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청 조경과에 문의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향의 이팝나무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 나무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수없이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나무의 이름을 궁금해 하는 이도 없었거니와 만개한 이팝꽃을 딱히 예쁘게 봐주는 이도 없었던 고향의 이팝나무가 조명 받는 현실이 잘 실감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500~600년 수령 외 누가, 어떤 연유로 심었는지 등의 이팝나무의 이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관광객들이 존재 가치를 알아보고 찾아주는 나무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팝꽃 쌀밥을 닮은 꽃의 모습에서 이팝(이밥)나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무색하지 않게 꽃 모양이 쌀밥을 많이 닮았습니다.
한인숙
이팝꽃의 어원은 꽃이 하얗게 피면 마치 사발에 수북이 담긴 흰 쌀밥(이밥)을 연상시킨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어린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모내기 철 논에서 모 뜨고 심는 동네 어른들의 눈길 속엔 이팝꽃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꽃이 풍성하게 많이 피면 풍년, 드문드문 적게 피면 흉년으로 여길 정도로 과거에는 풍흉을 점치는 신목의 상징성이 컸던 이팝나무가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 가로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농사일로 바쁜 빈 시골 마을을 지키던 이팝나무가 어느 새 번잡한 도시를 지키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이팝나무의 변화는 제게는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느껴집니다.
이팝나무는 병충해 및 척박한 토양과 매연 등 도시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5월이면 흰꽃이 만개하여 도시 경관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미관적 가치까지 높아서 최근 들어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이팝나무가 수놓은 하얀 꽃길을 걷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무의 쓰임도 변하고 나무를 대하는 인식도 달라지고, 어쩌면 그런 변화가 세상의 이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대학에서 패션 관련학과 학사, 석사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출판사 편집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국내 섬유, 패션 전문지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지난해 퇴직했습니다. 개인적인 관심 분야는 패션 외 정치, 도서, 그림 등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조금 잡다하게 좋아하고 즐기는 편입니다.
공유하기
풍년을 점쳤던 하얀 꽃나무, 이제 도시를 지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