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비켜봐" 불편하기만 했던 이웃이 우리 밭에 만든 것

서툰 초보농사 부부를 향한 거칠지만 따뜻한 정... 어느새 허물어진 마음의 경계선

등록 2026.05.07 13:13수정 2026.05.07 13:14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도시에서 오랜 시간 직장을 다니고 퇴직이 다가오면 많은 이들이 귀농, 귀촌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정작 어렵게 농촌으로 간 은퇴자 중 상당 수의 사람들은 다시 도시로 되돌아오는 '역 귀농'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제 귀농한 지 2년 차에 접어든 내가 '역 귀농'의 이유를 하나하나 살펴봤을 때, 충분히 공감되고도 남는 이야기였다. 퇴직 후 시골로 내려오면 생각지도 못한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 당장 주거 공간 마련이 우선이고, 농사를 짓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장비들을 사다 보면 초기 자금은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가지고 있는 자금이 소진되면 생활고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도시에 비해 의료, 편의 시설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무엇보다 한적한 여유를 꿈꿨던 이들에게 농사라는 육체 노동은 그리 만만치 않다. 정직한 수확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마치 정해진 법칙처럼 강도 높은 육체 노동이 요구되기 때문에 몸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2년 차 초보 귀농인인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어려운 부분은 바로 현지 이웃들과의 관계다.

귀농 후 만난 이웃

 초보 농사꾼이 가장 걱정했던 것.
초보 농사꾼이 가장 걱정했던 것. markuswinkler on Unsplash

초보 농사꾼인 남편과 내가 농사짓는 밭 주변으로는 오랜 세월 땅을 일구거나 소를 키워온 축사가 여러 채 자리 잡고 있다. 평생 벼농사를 지어오신 90세 할아버지 부부, 소를 키우는 60대 동업자들, 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는 부지런한 60대 부부, 나보다 나이가 작은 40대 육묘 업자 부부… 그 외에도 다양한 연령대의 이웃들이 있다.

귀농을 결심한 후 직장을 다니며 주말 텃밭에서 농사 연습을 여러 해 하면서 농사에 대한 육체적 노동 강도는 몸으로 겪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현지 주민들과 갈등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걱정은 늘 머릿속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 어설프긴 해도 첫해의 성과에 나름 만족하며 고추를 수확하고 있을 때였다. 오며 가며 우리 밭을 지나치던 예순 좀 넘어 보이는 이웃 한 분이 다짜고짜 "아니 그 멀쩡한 논을 뭐 하러 밭을 만들어서, 생고생하는 거야?" 큰 목소리로 내지르고 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며 고추밭에 있던 나는 멍하니 놀라기만 했다. "저 사람 누구야?" 남편에게 물어보니 "모르겠네. 가끔 지나가다 마주치기만 했는데, 우리 밭에 관심이 많은가 봐"라고 했다.


이후로도 그 이웃은 몇 번이나 지나가며 똑같은 소리를 뱉곤 했다. '아니, 내 땅에 내가 내 맘대로 농사짓겠다는데 웬 간섭이야' 내심 불편한 속내였다. 그렇다고 동네 사람과 대놓고 얼굴을 붉히며 싫은 소리를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분이 지나갈 때면 애써 시선을 외면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하다 새참을 먹고 있는데 저만치서 그분이 지나가는 걸 보고 남편이 먼저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오셔서 이거 하나 잡숫고 가셔요."


나는 내심 못마땅했지만 이미 남편이 말을 건넨 후라 애써 굳은 표정을 감추었다. 사실 이웃이 우리 밭을 여러 번 지나쳐 갔어도 우리 밭으로 직접 걸어 들어와 오밀조밀 갖추어 놓은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건네는 새참을 하나 받아 들고 밭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이게 밭농사가 쉬운 게 아닌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고추밭까지 들리도록 쩌렁쩌렁 내지르던 큰 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슬그머니 속내를 비치는 이웃이었다. 어디서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이들이, 누가 봐도 서투른 이들이 농사를 짓고 있으니 평생 농사만 짓던 이웃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냥 불안해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이웃과 새참을 나누며 잠깐의 시간 이후, 불편한 감정은 사라지고 왠지 나를 살펴주는 이웃이 하나 더 생겼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정으로 연결 되다

3시간만에 완성된 두둑 관리기로 했으면 하루종일 걸리고도 못했을 두둑이 3시간만에 완성됬다. 초보농부를 관심있게 봐준 이웃덕이다.
▲3시간만에 완성된 두둑 관리기로 했으면 하루종일 걸리고도 못했을 두둑이 3시간만에 완성됬다. 초보농부를 관심있게 봐준 이웃덕이다. 김희

지난 6일, 농기계임대사업소에서 관리기를 빌려 작물을 심을 두둑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웃이 지나가길래 멀리서 목례만 했는데, 잠시 뒤 이웃이 자신의 트랙터를 몰고 나타났다.

"아니, 그거로 언제 두둑을 다 만들어. 비켜봐. 내가 한 바퀴 돌아 줄게."

작은 관리기로 두둑을 만들고 있는 우리가 못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밭에 돌이 많아서 안 돼요. 그냥 저희가 할게요."

돌이 많은 흙이라 혹여라도 트랙터 장비에 문제가 생길까 봐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이웃은 한사코 트랙터에 올라타 돌 많은 우리 밭을 종횡무진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세 시간, 관리기로 했더라면 하루 종일 걸렸을 작업이 순식간에 끝났다.

트랙터로 로터리 작업까지 해주니 일사천리로 시원하게 작업이 마무리됐다. "밭에 뭔 돌이 이렇게 많아" 작업 중에 몇 번이고 던진 이웃의 타박이지만, 이제 내 귀에는 그 소리가 서운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돌밭을 일구느라 애쓰는 초보 농사꾼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소리로 들렸다. 겉으로는 거칠고 퉁명스러운 간섭으로 보였던 이웃의 시선이 사실은 서툴게 헤매는 우리를 향한 관심이자 응원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쩌면, 사생활 보호라는 이유로 마음의 벽을 쌓고 날을 더 세우고 있었던 것은 이웃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시골의 정을 지레짐작 간섭이라고 밀어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무심코 지나가다 본 우리가 마음에 걸려 자신의 트랙터를 끌고 와준 이웃을 보며 내 마음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시골의 문화가 다 편안하진 않지만, 우리를 살펴주는 이웃들의 관심이 이제는 간섭이 아닌 정으로 연결되고 있다. 간섭과 정 사이에서 조금씩 적응해 가는걸 보면 나도 이제 시골 사람이 되어 가고 있나 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초보농부 #시골인심 #정 #시골의정 #이웃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90년 12월 17일 첫 출근, 25년 12월 17일 마지막 출근 35년간 직장생활을 마쳤다. 이제 나는 자유인이다. 지금은 듀얼라이프, 도시와 시골 반반살기, 지금까지 나를 앞으로 나를 기록하는 글쓰기도 시작해본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도식 날 노무현 모욕 떼창? 이게 힙합인가 추도식 날 노무현 모욕 떼창? 이게 힙합인가
  2. 2 [단독] 남욱 "유동규, 미국 송금 알아봐달라 요청"...다시 흔들린 '428억 약정설' [단독] 남욱 "유동규, 미국 송금 알아봐달라 요청"...다시 흔들린 '428억 약정설'
  3. 3 주가 떨어질까봐 삼성전자 노조 비난하는 당신이 놓친 것  주가 떨어질까봐 삼성전자 노조 비난하는 당신이 놓친 것
  4. 4 [단독] 46년 만에 공개된 5·18 인터뷰, 힌츠페터가 촬영한 이 외국인의 정체 [단독] 46년 만에 공개된 5·18 인터뷰, 힌츠페터가 촬영한 이 외국인의 정체
  5. 5 국립수산과학원 기간제 연구원 숨진 채 발견... 유서에 '손찌검 당했다' 적어 국립수산과학원 기간제 연구원 숨진 채 발견... 유서에 '손찌검 당했다' 적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