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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도 음소거로 화면만, 절간 같았던 5월의 우리집

[미국 고딩 엄마로 살아남기] '시험'과 전쟁 치르는 나날들... 스스로 나아가는 모습이 감사합니다

등록 2026.05.08 11:48수정 2026.05.0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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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시험 보기 딱 좋은 아름다운 5월이다. 기가 막히게도 적당한 온도와 바람, 살랑이는 꽃 향기와 푸른 물결까지, 온 우주가 우리 집 '고딩'들의 밤샘 공부를 응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중간고사를 끝낸 우리 집엔 또다시 적막이 깔렸다. 이유는 하나. 대망의 'AP' 시험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미국 고등학교 수업은 난이도에 따라 일반(Regular) 과정, 심화 (Honors) 과정, 그리고 AP(Advanced Placement) 과정으로 나뉜다. 학생들은 자신의 수준에 맞춰 수업을 선택할 수 있다. 모두를 같은 속도로 끌고 가기보다 각자의 속도로 올라갈 계단을 만들어 두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시스템이 마냥 부러운 것 만은 아니다. 이것 역시 결국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긴장과 경쟁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최고 난이도라 할 수 있는 AP는 미국 고등학교에서 제공하는 대학 수준의 수업으로, 학생들은 한 해 동안 대학 1학년 과정에 가까운 내용을 배우고 5월이 되면 과목 별로 한 날 한 시에 전국 공통 시험을 치른다. 어떤 AP 과목을 몇 개나 들었는지, 또 성적이 어떠한 지는 대학 입시에서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될 뿐만 아니라 진학 후 대학 학점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기에 졸업을 앞당길 수 있고 이건 비싼 등록금을 절약할 수 있는 기회로 연결된다.

"걱정하지마!" 외쳤지만 초조한 건 나였다

AP과목 별 시험 일정. 과목 별로 미 전역의 고등학생들이 동시에 시험을 본다.
▲AP과목 별 시험 일정. 과목 별로 미 전역의 고등학생들이 동시에 시험을 본다. 오영주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AP 시험을 치르게 되는 아이들은 한 달 전부터 카운트다운을 했더랬다. 몇 주가 남았네, 며칠이 남았네 하며 부산 떨더니만 날이 가까워져 오자 집안은 절간처럼 조용해졌고, 오가며 들리는 한숨 소리에 괜히 나까지 눈치가 보여 TV 도 음소거 상태로 화면만 멍하니 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찾아온 D-DAY. 아침에 보니 둘 다 긴장한 얼굴이길래 나는 괜히 태연한 척 말했다.

"다 너희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을 하고 학교에 데려다 주는데 정작 초조한 건 나더라. 티 내지 않기 위해 말 수를 줄이고 아이들을 내려 준 후 돌아오는데 문득 예전 생각이 나 혼자 피식 거렸다. 10여년 전, 한글 떼기 앞에 더 이상 물러날 시간은 없다며 뽀로로 상을 펴고 마주 앉았던 우리 셋. 그 상 위에 너희는 눈물 콧물을 쌓아 올렸고 나는 참을 인을 수백 개쯤 쌓아 올렸더랬지. 두 아이의 하얀 머릿속에 글 세상을 넣은 게 어제 같은데 이제는 제 손으로 공부하고 제 발로 시험장에 척척 걸어 들어가고 있으니 언제 저리 컸나 싶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 한국에 살았을 땐 필요한 공부를 때 맞춰 들이밀곤 했던 나였지만, 미국에 정착한 뒤로 공부 만큼은 철저히 '노터치' 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절대 한국보다 쉽고 널널해서가 아니다. 내가 이곳의 교육과 진학 과정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오히려 아이들이 나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저걸 어떻게 다 영어로 배우지?' 싶은 마음도 있다.

공부는 결국 스스로 가속도를 붙이는 것


그리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자기 몫을 스스로 해내고 있었다. 묻은 게 똥인지 된장인지를 잘 아는 듯하고 발등에 떨어진 게 물 인지 불인지를 잘 아는 듯하다. 욕심도 있고 희망하는 진로도 있어서 그것에 닿기 위해 어떤 과정을 남겨야 하는지 스스로가 알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해 보면 공부라는 건 한국이든 미국이든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 스스로 가속도를 붙여 달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 시작은 우리가 마주 앉았던 그 뽀로로 상이었을지도 몰라. 너희가 사인펜으로 만신창이를 만들었던 그 뽀로로 상 말이야. 내가 한숨을 백만 번 쉬며 참은 '인'을 천만 번쯤 썼던 바로 그 뽀로로 상.

4시간 후,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걸어오는 두 얼굴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어쨌니저쨌니 대놓고 묻기가 좀 그랬는데, 모든 궁금증을 날려버리는 표정이어서 덕분에 나도 성적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쿨'한 엄마가 되어 볼 수 있었지.

잘 본 것 같고 마음도 홀가분한지 아이들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술술 꺼내 놓았다. 그 통에 점심을 차리고 먹는 데 한참이 걸렸지만, 나 역시 오랜만에 눈칫밥에서 탈출이었다. 다만, 아직 시험이 남아있다는 거. 또 다른 과목을 준비해야 한다는 거. 성적은 오는 7월이 되어야 나오니 잠시 잊기로 하자. 가정의 달 5월인데 우리 서로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미국고딩 #AP시험 #가정의달 #절간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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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주 후 글을 쓰며 초기화 된 제 인생을 스스로 구하는 중입니다. @ 브런치 '주재원, 부인들의 내조 전쟁터' 연재. @ 2026 문학고을 등단 - 상반기 신인 문학상 공모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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